Q: 마음이 힘을 잃는다고 상상하면 좀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 어떻게 마음 없이 살 수 있단 말입니까?
OSHO : 깨달은 사람은 지적 능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들보다도 더 효율적으로 마음을 사용한다. 마음 밖에 서서 모든 현상을 조망하기 때문이다. 그대의 의식이 보통의 합리적 이성이라는 틀을 넘어서면, 평상시에는 잠들어 있던 두뇌의 다른 부분이 작용하기 시작한다. 그 다른 부분은 오로지 그대가 이성의 틀을 초월했을 때에만 작용한다.
이것이 모든 깨달은 자들의 경험이다. 이 말은 나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확신 있게 하는 말이다. 나는 붓다의 말이라고 해도 무조건 믿지 않는다. 어쩌면 그가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고 잘못 알았을 수도 있다. 거짓말을 할 의도가 없었더라도 뭔가 착각해서 그런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실수했을 수도 있다.
나는 나 자신의 체험을 통해 그것을 안다. 그것은 너무나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에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마치 몸의 반쪽이 마비되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다.두뇌의 양쪽이 최대한도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어떻게 모르고 지나치겠는가? 마비되어 있던 사람이 어느 순간 갑자기 정상으로 돌아왔는데 그걸 모르고 그냥 지나치겠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내게 깨달음이 일어나기 전과 그 후의 차이점에 대해 너무나 확연하게 알고 있다. 나는 마음속의 어떤 부분, 전에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그 어떤 부분이 활동하기 시작하는 것을 알았다. 그 앎은 너무나 분명한 것이었다. 그 후로 내게는 어떠한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문제와 걱정, 긴장이 사라졌다.
이런 일은 마음의 다른 부분, 즉 지금은 기능하지 않고 있는 다른 부분의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마음 전체가 온전하게 작용하기 시작하고 그대는 그 마음의 밖에 존재할 때, 이때 그대는 마음의 주인이 된다. 마음이 주인 노릇을 한다면 이보다 더 최악의 주인은 없지만, 마음이 하인 노릇을 하게 되면 이보다 더 훌륭한 하인도 없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에는 마음이 주인 노릇을 한다. 그것도 반쪽이 마비된 반신불수의 주인이다! 반면에 그대가 주인이 되면 마음은 완전히 건강을 회복해서 최대의 능력을 발휘한다.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하인이 되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은 마음 밖에 서서 완벽하게 마음을 조종한다. 그의 깨어 있는 의식이 너끈하게 이 일을 해낸다. 몇 분간만 어떤 것을 관찰해보면 그대는 깨달은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완전히는 모르겠지만 그 상태를 조금은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분노를 관찰해 보라. 몇 분간만 관찰하면 분노가 사라진다. 성적 충동을 느낄 때에 주의 깊게 그것을 주시해 보라. 곧 그 충동이 사라질 것이다.
이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동이 사라지는데, 항상 마음 너머에서 마음 전체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대가 버리고 싶었던 추한 것들이 간단하게 증발되어 사라진다. 이 모든 것은 에너지이다. 명심하라. 분노는 에너지이다. 분노가 증발하면 그 뒤에 남은 에너지는 자비심으로 변모한다. 그것은 똑같은 에너지이다. 분노는 에너지를 둘러싸고 있는 형태form일 뿐이다. 주시를 통해 분노가 떠나가도 에너지는 남는다. 이제 분노의 형태에서 해방된 에너지는 자비심이 된다. 성욕이 사라지면 그 뒤에 엄청난 사랑의 에너지가 남는다. 마음속에 있는 추한 것들이 사라질 때에는 언제나 그 뒤에 소중한 보물들이 남는다.
깨달은 사람은 어떠한 것도 버리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에게는 어떠한 수련도 필요하지 않다. 잘못된 모든 것들이 저절로 사라진다. 깨어 있는 의식 앞에서 버틸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좋은 것들은 제 스스로 발전한다. 깨어 있는 의식이 거기에 자양분을 제공해 준다.
깨달은 사람은 기계적인 마음의 수중에서 벗어나 의식의 차원으로 들어간다. 뇌를 파괴하면 마음은 생명이 없어지겠지만 의식은 사라지지 않는다. 의식은 두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뇌로부터 자유로운 이 의식을 자각하면 몸과 두뇌가 죽어도 그대 자신은 전혀 영향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육체의 죽음은 그대에게 흠집 하나 내지 못한다.
사념 思念은 그 자체의 생명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이것이 내면의 기본 법칙이다. 사념은 그대의 동일시에 의존해서 생명을 이어 가는 기생충과 같다. 사념이 힘을 얻는 것은 그대가 자신을 사념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화가 났을 때에 그대는 그 분노와 동일시되어 있다. 그것이 분노에 생명 에너지를 제공한다. 그러나 마음의 스크린 위에 명멸하는 분노를 지켜볼 수 있다면 그대는 더 이상 분노에 생명 에너지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대가 분노와 동일시되지 않았을 때 그 분노는 무력하기 짝이 없다. 그대에게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한 채 무력하게 죽어 있다. 구름이 흩어지면 청명한 하늘이 드러나듯이, 분노라는 영상이 사라지고 그대 마음의 스크린이 텅 빈 채 남는다.
서서히 그대는 사념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이것이 주시와 관찰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조지 구제프George Gurdjjeff는 이것을 다른 말로 '비동일시non-identification'라고 불렀다. 그대는 더 이상 사념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마치 다른 사람의 사념을 구경하듯이 그대는 멀리 떨어진 곳에 초연하게 서 있다. 그대는 사념과의 연결선을 끊어 버렸다. 그럴 때에만 사념을 지켜보는 것이 가능하다.
관찰을 위해서는 거리가 필요하다. 동일시되어 있을 때에 그대와 사념은 너무 가까이 붙어 있다. 관찰에 필요한 거리가 확보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거울에 눈을 바짝 들이대면 얼굴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래야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사념과 너무 밀착되어 있으면 그 사념을 관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대는 사념의 영향을 받고 완전히 거기에 함몰된다. 분노가 그대를 화나게 만들고 욕심이 그대를 탐욕스럽게 만든다. 성욕이 그대를 욕정에 불타게 만든다. 그 사이에 간격이 없기 때문이다. 너무 밀착된 나머지 그대는 자신과 사념을 하나라고 착각한다.
주시는 이 밀착 관계를 없애고 그대와 사념을 분리한다. 주시하면 할 수록 그 사이의 간격이 더 벌어진다. 그리고 간격이 벌어질수록 사념이 그대에게서 흡수해 가는 에너지의 양이 줄어든다. 사념은 그대 외에 다른 에너지원이 없으므로 곧 죽어 가기 시작한다. 이렇게 사념이 사라져 가는 순간에 그대는 난생 처음으로 무심無心을 일별하게 될 것이다.
- OSHO,< 이해의 서>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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