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책을 죽였는가?
지금 출판사들은 자멸하고 있다.
2015.10.26
“하도 억울해서 10년 만에 법당에 찾아가니, 미리 만들어두었던 김영사 주식 포기 각서와 가회동 사옥 재산 포기 각서를 꺼내며 서명하라고 강요했다.” 지난 7월 27일 박은주 전 김영사 사장이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폭로한 내용이다. 박은주 사장은 이런 말도 했다. “김강유 회장이 2013년 12월에 나를 부르더니 회사를 반으로 축소시키고 가회동 김영사 건물(소유 박은주)을 팔자고 하더라. 출판사를 파주로 옮기자면서. 어렵겠다고 하자, ‘주×아리’, ‘대×리 컸다’ 등의 말로 고함을 치며 죽일 것처럼 달려들었다.”
박은주 사장은 한때 출판 여제로 불린 스타 출판인이다. 1983년 서른두 살의 나이로 김영사에 편집장으로 입사했다. 이후 30여 년 동안 수많은 밀리언셀러를 탄생시켰다. 1989년 김우중 회장의 에세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가 시작이었다. 이 책은 발간 6개월 만에 100만 부 넘게 팔렸다. 국내 최초의 단행본 밀리언셀러였다. 최단 기간 최다 판매라는 <기네스북> 기록까지 세웠다.
박은주 사장의 단행본 대박 신화는 계속됐다. 같은 해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로 연타석 만루 홈런을 쳤다. 1994년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으로 자기 계발서 붐을 일으켰다. 1998년엔 에릭 시걸의 <닥터스>로 대중소설 시장까지 장악했다. 같은 해 출판된 <먼나라 이웃나라>는 세계화 시대의 지침서였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이후 안철수 의원의 <영혼이 있는 승부>에 이르기까지 김영사는 유명인 에세이의 단골 출판사가 됐다.
박 사장과 김영사의 대성공은 한국 출판 산업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출판사들은 문학 전집류나 백과사전류 중심에서 대박 단행본 위주로 앞다퉈 사업 구조를 재편했다. 출판의 패러다임이 소품종 대량 생산 체제에서 다품종 소량 생산 체제로 전환됐다는 걸 의미했다. 문학 전집류나 백과사전류가 규격화된 공산품이라면 단행본은 소비자의 지적인 욕구가 실시간으로 반영된 결과물이었다. 미래학자 앨린 토플러는 <제3의 물결>에서 지식사회의 특징 중 하나로 다품종 소량 생산 체제를 들었다. 박 사장과 김영사는 한국 출판 산업에 제3의 물결을 몰고 왔다.
단행본 출판에선 가능한 한 다양한 책을 소량씩 시장에 내놓고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게 된다. 출판물 개발과 유통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했다. 가가호호 방문해 수십 권의 전집을 한꺼번에 팔던 외판 중심의 유통 방식이 사라졌다. 출판사들은 여러 단행본 필자들과 문어발처럼 계약을 맺었다. 그중에서 하나만 터져도 충분했다. 다만 어떤 책이 대박이 날지는 아무도 몰랐다. 가능한 한 많은 책을 서점에 진열할 수밖에 없었다. 대형 서점 중심의 유통 방식이 확대됐다. 서점은 넓고 살 책은 많은 시대가 열렸다. 이른바 김영사 패러다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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