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향기

오쇼, 당신은 공산주의를 지지합니까?

파라리아 2014. 1. 17. 20:46


질문:

사랑하는 오쇼, 당신은 공산주의를 지지하십니까?





오쇼:

지지하기도 하고 반대하기도 한다. 먼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측면을 이야기해 보자. 나는 소련과 중국, 그외 공산 국가들에 존재하는 공산주의에 반대한다. 나는 칼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 같은 사람들이 탄생시킨 공산주의에 반대한다. 이들이 탄생시킨 것은 공산주의가 아니다. 그 때문에 나는 반대하는 것이다.


이들이 탄생시킨 것은 독재적이고, 비인간적이며, 노예적인 사회다. 비민주적이고, 개인에 대한 존중이 없으며, 심지어 개인이라는 인식마저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란 하나의 숫자일 뿐이다. 마치 군대에서 인간을 숫자로 취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사람이 죽으면 군대의 현황판에는 '8번'이 전사했다거나, '8번'이 실종되었다고 기록된다. 이 심리적인 차이를 이해하겠는가? '8번'에게는 아내도 없고, 자녀도 없고, 어머니도, 늙은 아버지도, 늙은 할머니도 없다. '8번'은 그저 '8번'이다. 산술일 뿐이다. 인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지만 그 사람의 진짜 이름으로 대체한다면 그대는 다르게 느낄 것이다. 그대는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의 아내는 어떻게 될까? 그에게도 친구가 있을텐데. 그에게 생계를 의지하고 있는 어머니와 늙은 아버지는 어떻게 될까? 그의 자녀에게는 무슨 일이 생길까?


이 때문에 군대에서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숫자만을 사용한다. 이름은 다른 사람들에게 심리적인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숫자는 대체 가능하다. '8번'이 쓰러졌으니 내보내라. 그러면 다른 사람이 '8번'이 된다. 그는 '8번'의 아내의 남편이 아니다. 그는 '8번'의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다. 군대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 숫자는 대체 가능하지만 인간은 대체할 수 없다. 칼 마르크스에게서 나온 공산주의는 비인간적이다. 그대의 개인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물질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이 물질에 불과하다면 살아있으나 죽으나 무슨 상관인가? 따라서 스탈린은 러시아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아주 쉽게 죽일 수 있었다. 만일 마르크스가 인간이 물질일 뿐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스탈린의 작업은 그렇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다. 스탈린은 수백만 명을 죽이면서 양심에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그가 죽인 사람들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영혼이 없다. 그들은 기계일 뿐이다.


나는 사람들에게서 인간성을 앗아간 이런 어리석은 이데올로기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성은 풍요로워져야 하고, 개인성은 강렬해져야 한다.


이런 공산주의는 한 개인으로서의 모든 것을 파괴한다. 또한 인간이 집단적인 전체의 한 일부분이 되기를, 기계의 한 톱니바퀴처럼 언제나 대체 가능한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 나는 어떠한 인간도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모든 인간은 너무나 독특해서 그를 대체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에는 개인에 대한 존중이 없다. 이런 공산주의가 무엇을 닫아버렸는지 아는가? 그것은 그대 자신의 존재로 가는 문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 그대 자신의 존재로 가는 문이 닫히면 그대는 존재계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버린다. 그러면 진리에 대한 탐구와 추구의 가능성은 사라진다. 그대 자신을 깨닫고, 그대 자신이 될 가능성이 사라진다. 사실 그대 자신이 되고 그대 자신을 아는 것은 위험하다. 그냥 자기 자신이 없는, 기계의 한 톱니바퀴가 되는 편이 더 낫다.


마르크스의 발상은 내적인 탐구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 나는 마르크스를 가엾게 여긴다. 그는 지성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단지 지적이고 책 읽기 좋아하는 책벌레에 그치고 말았다. 그는 대영박물관 도서관에 매일 첫번째로 입장했고, 박물관이 문을 닫아야 했기 때문에 매일 밤 강제로 퇴장해야 했다. 때로는 들것에 실려가야 했는데, 하루종일 책을 읽으며 담배를 펴서(그가 하는 일은 이게 전부였다) 종종 의식을 잃었기 때문이다. 40년에 걸쳐 대영박물관은 이 사람이 골칫거리였다. 하지만 그들은 알게 되었다. "우리는 그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는 맨 처음 오는 사람이고(그는 문이 열리기도 전에 문 앞에 서 있다) 맨 마지막에 나가는 사람이다. 그가 의식이 있으면 내보낼 수 있고, 그가 의식이 없으면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데려가야 한다."


마르크스는 단 한순간도 명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는 내면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책이었다. 그가 <자본론Das Dapital>에서 쓴 것은... 공산주의자들도 이 책을 읽지 않는다. 나는 수백 명의 공산주의자들을 만나보았지만 어느 누구도 이 책을 읽은 사람이 없었다.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소장하듯이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이 책을 집에 소장하고 있다. 그것은 공산주의의 성경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정확히 삼위일체를 만들어냈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이다. 그리고 공산주의의 성경은 <자본론>이다. 하지만 아무도 이 책을 읽지 않는다. 나는 <자본론>을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샅샅이 읽어보았다. 이 책은 온통 말 투성이일뿐 경험이 들어있지 않다. 다른 책에서 따온 인용들은 있지만 진정한 경험, 그 자신만의 경험은 단 하나도 들어있지 않다.


(중략)


마르크스는 유대인들이 세상에 내놓은 또 하나의 선물이다. 그는 정말로 유대인이다! 그리고 그가 공산주의의 창시자가 된 이유는 그가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절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부자들에 대한 질투심 때문이었다. 이 점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이 점이 전체적인 관점을 바꾸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아버지는 가난했고, 아버지의 아버지도 가난했다. 마르크스는 가난했기에 한 친구의 지원에 의존해 살았다. 바로 프리드리히 엥겔스다. 엥겔스는 부자였고 마르크스에게 계속 돈을 대주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대단한 지식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자신이 쓴 모든 책에 엥겔스의 이름을 올렸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단지 마르크스가 존경심을 표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올렸을 뿐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옳다. 엥겔스가 없었다면 마르크스는 책을 쓰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 굶어 죽었을 것이다.


유대인이면서 가난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나는 자이나교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자이나교인들은 인도의 유대인들이다. 그대는 인도 전역에서 단 한 명도 자이나교 거지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거지들은 모두 힌두교인이다. 자이나교 거지는 한 명도 없다. 나는 인도 전역을 뒤져보았으나 자이나교 거지를 단 한 명도 발견하지 못했다. 자이나교인들은 가난하지 않다. 모두가 부유하고 편안한 삶을 누린다. 게다가 대부분은 인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다.


다른 모든 유대인들이 부유한데 자기만 유대인이면서 가난하다면 당연히 질투심이 생겨난다. 마르크스가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동정으로 <자본론>을 쓴 것이 아니다. <자본론> 어디에도, <공산당 선언> 어디에도, 마르크스가 쓴 어떤 책에서도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동정을 보여주는 단 하나의 문장도 발견할 수 없다. 그것은 부자들에 대한 질투심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정의해야 한다면 정확히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란 "부자들을 몰락시키고 재산을 공평하게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러시아와 중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일이다. 가난한 자들은 여전히 가난하지만 일면 만족스러워 한다. 부자들이 몰락하고 재산이 분배되었기 때문이다. 비교는 사라졌다. 이제 그대가 가난하다고 느낄만한 대상인 부자들은 어디에도 없다. 그대는 여전히 가난하다. 물론 가난은 공평하게 분배된다.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가난하다. 따라서 누구도 비교할 수 없고 누구도 질투를 느낄 수 없다. 누구도 상황이 지금보다 더 나아지리라 생각할 수 없다.


나는 부자들을 몰락시키고 가난을 분배하는 일을 지지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오늘날 존재하는 공산주의,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반대한다. 그러나 나는 완전히 다른 개념의 공산주의를 지지한다. 나에게 공산주의란 자본주의의 마지막이자 가장 높은 단계를 의미한다.


나는 공산주의가 계승할 수 있는 자본주의를 반대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실현되었을 때 공산주의가 일어난다. 


자본주의는 자본과 부를 창출해내는 세계 최초의 시스템이다. 이전에는 봉건주의가 있었다. 봉건주의는 부를 창출하지 못했다. 봉건주의는 사람들을 착취하고 약탈했다. 과거에 왕이 소유한 부는 범죄였다. 그것은 착취를 통해 강제로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약탈한 것이었다. 그들 스스로 만들어낸 부가 아니었다.


자본주의는 부를 창출해내는 최초의 시스템이다. 부를 창출해내려면 지성이 필요하다. 우리가 아주 많은 부를 창출해서 부가 의미 없어질 정도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아주 높은 수준의 부를 창출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저절로 부유해질 정도가 되지 않는다면... 누구도 부를 먹고 살 수는 없다. 그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렇게 되면 부의 포화 상태가 온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포화 상태의 지점까지 이르면, 오직 그 시점에서만 공산주의가 꽃피어난다. 이 때문에 나는 나의 공동체를 코뮨(commune)이라고 부른다. 공산주의를 뜻하는 코뮤니즘(communism)이라는 단어는 '코뮨(commune)'에서 왔다.


나는 자본주의를 신뢰한다. 아마도 자본주의를 신뢰한다고 분명하게 선언한 사람은 세계에서 내가 유일할 것이다. 왜냐하면 부를 창출하는 시스템이 존재하고, 과학 및 과학기술과 결합해 아주 많은 부를 창출해서 더이상 가난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도래했기 때문이다. 부를 분배할 필요도 없다. 부는 저절로 분배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필요 없다. 자본주의는 민주주의, 개인성, 언론의 자유와 완전하게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자본주의는 아무 것도 파괴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의 접근방식은 우리가 부의 분배보다 부의 창출에 대한 생각을 퍼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부를 갖고 있지 않다면 무엇을 분배할 것인가?


마르크스조차 공산주의가 러시아나 중국에서 일어날 거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들 나라들은 아주 가난하기 때문이다. 분배할 게 무엇이 있단 말인가? 마르크스조차 공산주의는 미국에서 처음 일어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러시아에서 처음 일어났다. 물론 그것은 거짓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더 행복하고 더 부유하고 더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가진 모든 것을 파괴하고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곧 모두 부자가 될 것이요."라는 거짓 희망을 심어주었다. 그 '곧'은 언제 찾아오는가? 혁명이 일어난지 60년 이상이 흘렀다. 당시의 혁명가들은 모두 죽었다. 모두들 그 날이 오리라 희망했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가난하다.


심지어 가장 가난한 미국인조차 봉급이 높은 러시아인보다 나은 환경에서 산다. 그리고 러시아인들은 엄청난 가치를 지닌 것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자유를 잃었고, 개인성을 잃었으며, 표현의 자유를 잃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그들은 거대한 강제수용소에 살고 있다. 재판도 없고, 호소할 곳도 없으며, 그들의 목소리가 전달될 가능성도 없다.


나는 이런 식의 공산주의에 반대한다. 이것은 아주 파괴적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내가 생각하는 공산주의가 있다. 이 때문에 나는 공산주의에 찬성하기도 하고 반대하기도 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대가 알고 있는 공산주의에는 반대하지만, 내가 계속해서 주장하는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찬성한다.


부를 창출하라. 오늘날은 과학과 기술이 부를 창출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제공한다. 분배를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어리석은 일이다. 분배에 대해서는 잊어라. 부를 아주 많이 창출해서 포화 상태의 지점까지 이르게 하라. 그러면 거기서부터 부가 모두에게 퍼지기 시작한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가 궁극적으로 꽃피어난 것이다.




- 오쇼, <From Unconsciousness to Consciousness>, 8장 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