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史官 이야기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최고 통치자인 국왕의 언행은 물론 각종 사건 사고, 주요 국가 통치행위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을 후대에게 남기기 위해 국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임무가 주어진 존재가 사관(史官)이다.
조선은 왕들이 입법·사법·행정의 전권을 쥐고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던 왕조시대였던 만큼 왕들의 권한이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왕의 독주를 막기 위해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사관(史官)들의 기록과 의정 대신들의 논의, 사헌부와 사간원 관리들의 간언, 그리고 일반 백성들의 격쟁(왕의 행차 중에 징을 쳐서 소원을 말할 기회를 만드는 것), 상소, 신문고 등이 왕권에 대한 견제장치라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제도가 사관(史官) 제도였다. 조선시대엔 사관의 입회 없이는 임금이 신하와 대화를 나눌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국가 통치행위와 관련된 임금의 모든 언행과 행동, 동작은 빠짐없이 사관들이 기록했으니 임금과 신하의 은밀한 독대(獨對)라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사관들의 기록정신, 직필(直筆)정신이 얼마나 투철했는지는 오늘날까지 전해져 온 조선왕조실록이 잘 증명하고 있다. 실록 속에 나타난 사관의 모습을 소개한다.
조선왕조 500년을 여행하다 보면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춘추필법이 번득이고 있음이 발견된다. 사관들은 왕과 대신들의 언행에 직필을 휘둘렀다. 왕에게 올바른 간언을 못 하고 비위를 맞추는 대신들이 있으면 사관들은 가차없이 ‘종기를 빨고 치질을 핥아가며 아첨하는 무리’라고 비판했다.
사관들은 자신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왕에게도 비판의 필봉을 피해가지 않았다. 중종 39년 11월 15일 사관은 왕에 대해 이러한 논평을 적어놓았다.
<사신은 논한다.
중종대왕은 공검 인자하시어 재위 40년 동안 안으로는 성색을 즐기는 일이 없었고, 밖으로는 사냥하며 즐기는 데 빠진 적이 없다. 즉위한 이래 조야가 모두 바라보고 태평을 기약했는데 신하의 보좌를 받을 즈음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했다. 처음에는 기묘년에 징계되고, 나중에는 정유년에 실수하여 조정이 붕당을 지어 서로 모함함으로써 드디어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생을 즐기는 마음이 잠시 열렸다가 끝내는 닫혀지고 말았다.
임금(중종)은 인자하고 유순한 면은 있으나 결단성이 부족하여 일할 뜻은 있었지만 일을 한 실상은 없었다. 좋아하고 싫어함이 분명치 않고 어진 사람과 간사한 무리를 뒤섞어 등용했기 때문에 재위 40년 동안 혼란한 때가 많아 끝내 조금의 안정도 이루지 못했으니 슬프다.>
명종은 아침저녁으로 성질이 변화무쌍하게 변화하는 인간 유형이었는데 그에 대한 사관의 비판도 가혹하기 그지없다. 다음은 명종 17년(1562) 7월 12일의 기록.
<임금은 성품이 강직하여 환관들의 잘못을 조금도 용서하지 않고 항상 궁중에서 조금이라도 거슬리거나 소홀히 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꾸짖고 매를 치기까지 했다. 기쁨과 분노가 일정하지 않아 아침에 벌을 주었다가 저녁에는 상을 주고, 또는 저녁에 파면시켰다가 아침에 다시 임명하니 환관들이 임금의 마음을 미리 헤아려 두려워하지 않았다.
임금이 항상 젊은 내시 하나를 총애하여 침실 곁에 있게 하고 절도 없이 상을 하사하고, 심지어 내탕금으로 그가 살 집을 사주기까지 했다. 또 재주 있는 자를 골라 노래를 익히도록 했다. 정번도 역시 음악을 잘한 것 때문에 총애를 받아 직위가 2품에 이르렀다. 이양이 권세를 부릴 때 임금은 매번 정번을 시켜 그의 집에 왕래하게 했다.>
숙종의 통치행위에 대한 사관들의 논평도 가혹하기 짝이 없다. 숙종 33년(1707) 1월 25일 강화에 둑 쌓는 일과 황해도에 대동법 시행여부를 논할 때 임금이 아무 이유 없이 몇 시간이나 대신들을 문 밖에 대기하도록 하자 사관은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사신은 말한다.
오늘의 일은 적이 개탄스런 바가 있다. 무릇 일을 아뢸 때 임금이 미처 식사를 하지 않았다면 신하들에게 잠시 물러가 있으라 명하고, 혹 측간(화장실)에 가면 잠시 물러가 있으라 하는데, 그 사이는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오늘은 업무를 아뢴 것이 반도 되지 않아 임금이 갑자기 여러 신하를 물러가 있으라고 명하여 오전 아홉 시에서 낮 한 시가 지나도록 입시를 명하지 않았다. 대신들이 참새처럼 늘어서서 기운이 고달프고 몸이 지쳐 예모를 잃은 뒤에야 입시를 명했다. 임금이 대신을 예우하지 않음을 볼 수 있으니 통탄스러움을 견딜 수 있겠는가.>
태종 4년(1404) 2월 8일의 사건. 이날 임금은 격무에 시달리다 오랜만에 야외로 나가 사냥을 즐겼는데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그만 말이 거꾸러지면서 낙상했다. 태종은 좌우를 둘러보며 “사관이 알지 못하도록 하라”고 지시한다. 그런데 “사관이 알지 못하도록 하라”고 지시한 정황까지를 실록에 기록했으니 왕은 사관들에게 철저히 감시당하고 사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사관들이 이처럼 정확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는 현장 입회하에 철저한 취재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어전(御前)에서 열리는 각종 회의와 국사를 논하는 현장에 사관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은 하루아침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 사관들에게 감시당하길 거부하는 왕과, 왕의 통치행위 전반에 대한 감시체계를 구축하려는 신하들 간의 힘겨운 줄다리기를 통해 하나씩 성취된 것이다.
태조 1년(1392) 8월 21일, 임금이 평주 온천에 거동할 때 여러 신하들 틈에 사관 한 명이 임금을 따랐다는 기록이 보인다.
<사헌부 대사헌 남재 등이 아뢰었다.
“임금의 동정은 모든 백성이 보는 바이며, 뒷세상에서 본받을 것이니 창업 군주는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예절을 갖추는 것을 번거롭게 여기신다면 대간, 중방(2군 6위의 상장군과 대장군 도합 16명이 한자리에 모여 군사에 대한 일을 논의하던 기관), 통례문(조회를 맡아보던 관아), 그리고 사관 각 1명씩이 수행토록 하여 뒷세상에서 경솔한 행동을 할 단서를 제공하지 말도록 하소서.”>
같은 해 9월 14일에는 예문 춘추관에서 세 가지 업무를 상소했는데, 그 내용 안에 사관제도에 대한 골격이 들어 있다.
<정전에서 정무를 결재하고 신하들을 접견할 때는 사신이 좌우에 입시하여 크고 작은 것을 가릴 것 없이 모두 참석해서 듣도록 하소서.
겸직 관리로서 수찬(궁중의 경서, 사적, 문서를 관리했던 홍문관의 정6품 관직) 이하의 관직에 임명된 사람은 각자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하여 사초(史草)로 만들어 춘추관으로 보내게 하소서.
서울과 지방의 크고 작은 관공서에 소식을 알려 해당 관공서가 시행한 것이 국가 운영에 관련되고 후세에 전할 만한 내용이 있으면 공문서로 춘추관에 보내게 하소서. 또 도평의사사(조선 초기 문화부, 삼사, 중추원의 종2품 이상 관원이 모여 국가의 중대한 일을 의논하던 최고 의결기관)와 검상 조례사(법률 제정을 맡아보던 관청)에게 매달 마지막 날 조례를 모두 써서 춘추관에 보내 기록하고 이것을 일정한 법칙으로 삼도록 하소서.>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 史官을 두려워해...
뭔가를 취재하고 기록하려면 현장에 가서 보고, 듣고, 관찰해야 하는 것은 기록자들의 의무이자 권리였다. 그러나 그 기록을 해야 하는 대상이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국왕'이라면 사정이 좀 복잡해진다.
태종 1년(1401) 6월 22일 임금이 청화정(조선 초기 경복궁 북쪽에 있던 정자)에 나가 대신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밭과 노비를 상으로 주었다. 이 행사에 사관이 참석하려 하자 문지기가 저지했다. 김과가 사관 노이에게 “다섯 승지가 모두 춘추관을 겸하고 있어 임금의 언동을 충분히 기록하고도 남는데, 사관이 왜 또 들어오려고 하는가” 했다. 사관은 “그러면 사관의 직책을 없애는 것이 좋겠다” 하고 서로 언성을 높이는 장면이 목격됐다.
태종 1년 7월 8일에는 사관 민인생이 임금의 행동을 엿보다가 탄로나는 바람에 조정을 긴장시킨 사건이 발생했다.
<임금이 편전에 앉았는데 민인생이 문 밖에서 엿보았다. 임금이 “저게 누구인가”하고 물으니 대신들이 “사관 민인생입니다” 했다. 임금이 노하여 말했다.
“이제부터 사관은 날마다 예궐하지 말라.”>
이 사건이 정치적으로 비화되자 태종 1년 7월 11일 문하부(조선 초기 정사를 총괄하던 최고부서)에서 임금에게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예전에 중국 각 나라에 사관이 있어 항상 임금의 좌우에서 언행과 정사를 기록하여 후대의 규율로 삼았습니다. 지난번에 이 일을 직접 말씀드려 사관이 날마다 입시하도록 했습니다.
이번 사건은 사관이 적임자가 아니어서 나아가고 물러감에 예를 잃은 소치입니다. 한 사관이 실례했다고 만세의 좋은 법을 없애려 하시니 참으로 애석합니다. 원컨대 사관들은 신하들이 국사를 아뢸 때마다 따라 나오고 따라 물러가게 하여 만세에 모범을 남기소서.
사관 민인생은 입시할 때 여러 번 예를 잃어서 휘장을 걷고 엿보기까지 했으니 불경함이 매우 심합니다. 관련 부서에 명을 내려 그의 직책을 거두고 먼 곳에 귀양 보내소서.”>
결국 민인생은 임금을 몰래 엿본 죄로 변방에 귀양 가는 처지가 됐다. 이처럼 조선 초기 사관들은 귀양 가기를 서슴지 않으며 역사의 현장에 참여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연 외에는 참석이 허락되지 않아 기록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사관들이 정사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난 것은 태종 5년(1405) 6월 14일 이후의 일이다.
<형조참의 최긍이 아뢰었다.
“사관은 국사를 기록하는 직책을 맡았는데 지금은 경연 외에는 참여할 길이 없으니 유감입니다.”
이에 임금이 사관 정주를 불러 명했다.
“앞으로는 육조에서 보고할 때 내외를 가리지 말고 들어오라.”>
이날을 계기로 사관들의 ‘현장취재’에 대한 숨통이 어느 정도 트였다. 그러나 사관이 궁궐 곳곳을 들쑤시고 다니며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캐고 다니자 임금은 큰 불편을 느꼈다.
이 와중인 태종 10년(1410) 4월 28일, 이승직과 김자서가 제주에서 돌아와 임금과 중궁을 만났다. 또 경원에서 급보가 올라와 임금이 안등과 김여지를 불러 대책을 논의했는데, 이때 사관 최사유가 따라 들어왔다. 임금이 노하여 (입시를 허락한) 문지기를 곤장을 때리려다 그만두고 사관을 가두었다.
태종 12년 11월 20일에는 사헌부 대사헌 정역이 사관을 조계에 입시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다.
<“매번 조계 때마다 사관이 직필을 잡고도 참여하지 못하니 신은 전하의 아름다운 말씀과 선정이 후세에 전해지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했으나 임금이 대답하지 않았다. 조회가 끝나자 임금이 김여지 등에게 일렀다.
“예전에 사관 민인생이 경연 때 병풍 뒤에서 엿듣고 곧장 내연(궁중잔치)으로 들어왔다. 또 들에 나가 매사냥을 할 때 얼굴을 가리고 따라왔으니 모두 음흉한 행동이다. 지난해에 한 사관이 곧장 내전으로 들어오기에 그 뒤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이다.”>
좌사(左史)는 동작, 우사(右史)는 발언을 기록
사관의 조계 입시가 허락된 것은 태종 13년(1413) 1월 16일이다. 당시의 정황을 소개한다.
<사헌부에서 상소했다.
“예전에는 천자가 움직이면 좌사(左史)가 이를 쓰고, 말을 하면 우사(右史)가 이를 쓰게 되니 일을 쓴 것이 ‘춘추’가 되고, 말을 쓴 것이 ‘상서’가 됐습니다. 임금은 사관을 좌우에 있도록 하여 한 가지 말, 한 가지 동작도 쓰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생각건대 전하는 옛것을 본받아 글 잘하는 선비 8명을 뽑아 이름을 사관이라 하여 실록을 기록하게 하고, 또 대언과 시신에게 모두 사관직을 겸직하게 하여 날마다 좌우에 모시게 했습니다. 그러나 사관을 겸직한 자는 각각 직무의 번거로움이 있어 실록의 상세한 내용은 사관이 극진하게 돌보는 것만 못합니다. 지난번에 전하께서 사관이 진퇴에 실수가 있다 하여 가까운 곳에 입시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신은 전하의 아름다운 말이 후세에 다 전해지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원컨대 전하는 옛 법도를 따라 사관으로 하여금 날마다 임금의 곁에 모시게 하여 만세의 법이 되게 하소서.”>
이 상소를 임금이 허락함으로써 사관들은 취재의 폭이 넓어지게 됐다. 이날 사헌부의 상소에서 보듯 조선시대에는 기록의 엄정함을 위해 좌사(左史·왕의 왼편에 앉은 사관)는 임금의 동작을, 우사(右史·왕의 오른편에 앉은 사관)는 임금의 말을 기록했다. 그러나 실제로 입직사관을 두 명으로 한 것은 세종 7년(1425) 11월 3일의 일이다.
<임금이 지시 내리기를 “앞으로는 매일 조계에 사관 두 사람이 종이와 붓을 가지고 입시하여 일을 기록하고 대언과 함께 물러가며, 조계한 뒤에는 한 사람이 전례에 의해 일을 기록하라”고 했다.
처음에 영춘추관사 이원 등이 글을 올리기를 ‘생각하건대 옛적에 좌우사(左右史)를 두어 말과 일을 기록했고, 지금 명나라에서는 어전에서 정사를 볼 때 태사(太史)에게 붓을 잡고 좌우에 갈라서서 보고 듣는 대로 기록합니다. 우리 조정에서는 개국 초부터 사관 한 사람을 입시하게 했으나, 한 사람이 보고 들은 바를 다 기록하지 못하여 물러나와 다시 기록하므로 빠지고 잊음이 없지 않습니다. 옛 법에 의해 사관 두 사람이 붓을 잡고 좌우에 입시하게 하고, 또 승정원 곁에 가까운 집 한 칸을 주어 거처하게 하여 모든 장계나 하교한 일을 사관의 기록을 거친 뒤 육조와 대간에 내리기를 원합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달 동안 머물러 두었다가 오늘 명이 있었다.>
문종 1년(1450) 5월 9일에는 사관의 활동 범위를 좀더 넓히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니 그 정황은 다음과 같다.
<이인전 등이 아뢰었다.
“요즘 들어 대신들이 사관을 막아서 듣지 못하게 하고, 또 조계나 경연에서도 먼저 나가게 하여 뒤에 의논한 일을 듣지 못하게 하시니, 신은 그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임금의 말과 거동에 어찌 사관이 알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만약 기밀의 중대한 일이라 듣지 못하게 한다면 국가에 사관을 둔 본뜻에 어긋납니다. 혹시라도 사관을 막고서 일을 의논했다고 쓴다면 어찌 후세에 의심을 사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후부터는 크고 작은 일에 다 사관이 참여하게 하고, 경연이나 조계에서 맨 뒤에 나가도록 하여 모든 일을 정확히 기록하도록 하셨으면 합니다.”>
사관을 대함에 있어 세조는 다른 임금과는 독특한 면이 있는 군주였다. 무력으로 조카를 내쫓고 왕위를 차지한 세조는 여러 대신들에게 자주 연회를 베풀었으며 사관의 춘추필법(春秋筆法)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다음은 세조 2년(1456) 8월 23일 실록.
<사정전에 나가 사관 김이용에게 명하여 술을 올리게 했다.
임금:“내가 잘못하면 네가 말할 수 있느냐.”
김이용:“규간(옳은 소리로 간언하는 것)은 소신의 임무가 아니라 황공하여 말을 못합니다.”
임금:“(승지 조석문을 돌아보며) 사관의 말이 이와 같으니 어떠냐.”
조석문:“위로 공경(벼슬이 높은 사람)으로부터 아래로 백집사(百執事·여러 실무자)에 이르기까지 임금의 잘못을 다 말할 수 있습니다.”
임금:“승지의 말이 옳다. 사관이 실언한 듯하다. 사관에게 벌로 술을 주라. 나의 잘잘못은 수많은 눈이 보는 것이니 숨길 수 없다. 사관이 사실대로 자세히 기록해야 한다. 앞으로는 강무할 때 반드시 사관 두 사람을 갖추라. 한 사람이 유고하면 자세히 기록하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이다. 너희 승지들도 반드시 다 기록하라. 우리나라에서 일을 기록하는 글이 중국에 미치지 못하나 다만 사실을 빠뜨리지 않아야 하고, 글을 만들되 무딘 것은 반드시 염려할 바가 아니다.”>
세조 3년(1457) 10월 15일, 임금은 임영대군(세종의 넷째 아들로 세조의 동생)과 계양군 이증(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 소생의 아들)의 인물평을 하고는 사관에게 기록하라는 명을 내렸다.
<사정전에 나가 임금이 임영대군을 불러 술을 올리게 하고 조석문에게 이르기를 “임영대군은 질박하고 성실한 사람이다. 화려한 옷을 입지 않으니 유학하는 선비의 기상이 있다”고 말했다. 계양군 이증을 불러 이르기를 “너는 깨끗한 의복을 좋아하고 스스로 아름답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 임영대군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사관에게 이 말을 기록하도록 했다.>
전주사고(全州史庫).
제왕은 오직 사필(史筆)을 두려워할 뿐
정종은 왕위에 오르고 싶어 오른 것이 아니라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골육상쟁(骨肉相爭)의 피를 묻힌 이방원에게 등을 떠밀려 왕위에 올랐다. 그는 이방원 세력이 쥔 권력의 칼날이 언제 자신을 향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왕위를 이어가는 불운한 왕이었다. 이런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정종은 오늘날의 골프와 비슷한 격구를 자주 즐겼다. 신하들 입장에서 제왕이 정사(政事)에는 뜻이 없이 격구를 지나치게 즐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정종 1년(1399) 1월 19일 격구 문제로 임금과 신하 간에 이런 대화가 오가는 장면이 목격됐다.
<경연에 나갔는데 여러 왕실 친척이 환관과 더불어 내정에서 격구하느라 떠드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임금이 사관 이경생에게 말하기를 “격구하는 일 같은 것도 사책(史冊)에 쓰는가” 하니 이경생이 “인군의 거동을 반드시 기록하는데 하물며 격구를 쓰지 않겠습니까” 했다.>
태종 1년(1401) 3월 23일 태종은 오랜만에 사냥을 나섰다. 그런데 마음 편히 사냥하는 자리에 사관이 나타나자 임금은 주위 대신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임금:“(다섯 승지에게) 사관이 사냥하는 곳에 따라온 것은 무슨 까닭인가.”
신하:“사관의 직책은 시사를 기록하는 것이므로 임금의 거동을 어찌 빼놓을 수 있겠습니까.”
김과:“임금은 구중궁궐에 있기 때문에 경계하는 뜻이 날로 풀리고, 게으른 마음이 생기는 것을 누가 말리겠습니까. 임금은 오직 황천과 사필(史筆)을 두려워할 뿐입니다.”
임금:“왜 그런가.”
김과:“하늘은 형상이 없으니 착한 것은 복을 주고, 음란한 것은 화를 줍니다. 사필은 시정의 좋고 나쁜 것과 행동의 잘잘못을 곧게 쓰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만세에 전하여 효자와 자손이 그 내용을 고치지 못하니 두려운 일이 아닙니까.”
임금:“그렇구나.”
김과:“비록 임금께서 사관에게 입시하지 못하게 해도 다섯 승지가 모두 춘추관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일거일동을 모두 씁니다.”
임금이 처음에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사관을 소홀히 여겼는데, 이때부터 언동을 더욱 조심했다.>
조선 초기에는 사관의 성격이나 임무 등이 확고하게 정착되지 않은 상황에서 ‘후세의 교훈을 기록하기 위해 좀더 자유로운 취재를 보장해 달라’는 사관과 ‘국왕도 프라이버시를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는 임금 사이에 팽팽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다음은 태종 1년(1401) 4월 29일 실록.
<편전에서 정사를 보았다. 사관 민인생이 들어오려 하자 박명이 말리면서 “어제 홍여강이 섬돌 아래 들어왔었는데,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일전(조선 초기 경복궁의 경전) 같은 곳이면 사관이 마땅히 좌우에 들어와야 하지만 편전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하시었다”고 말했다. 민인생이 일찍이 지시가 없었으므로 마침내 뜰로 들어왔다. 임금이 그를 보고 말했다.
임금:“사관이 어찌 들어왔는가.”
민인생:“전일에 사관이 좌우에 입시하기를 청하여 허락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들어왔습니다.”
임금:“편전에는 들어오지 말라.”
민인생:“편전에 입시를 못하게 하시면 대신의 발언과 경연에서 강론하는 것을 어떻게 기록하겠습니까.”
임금:“(웃으며 말하기를) 이곳은 내가 편안히 쉬는 곳이니 들어오지 않는 것이 옳다. 사필(史筆)은 곧게 써야 한다. 비록 대궐 밖에 있더라도 어찌 내 말을 듣지 못하겠느냐.”
민인생:“신이 만일 곧게 쓰지 않는다면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
출처 : 월간조선 [김용삼의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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