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향기

[스크랩] 조선시대 사관들은 일종의 신문기자나 다름없었다(2)

파라리아 2009. 10. 24. 15:41

 

 

 실록을 꺼내 보려 했던 태조(太祖) 이성계

 

이 세상에 누군가에 의해 자신의 말과 행동이 일일이 감시당하고, 기록을 당하는 처지에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이 행복할까, 불행할까?

그 기록을 당하는 주체가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이자 국가원수이며 국군통수권자라면?

실록이란 후대의 사람들이 국가운영에 참고 삼으라는 뜻에서 국가 최고 통치자의 언행과 통치술, 각종 보고서, 인사기록, 포고문 등을 상세히 기록해 놓은 것이다.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괴로울 수가 없겠지만, 그것을 접하는 후손들은 "우리 조상들 참으로 훌륭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구나" 하고 감탄할 때가 많다.

사관의 기록은 실록 작성의 근간임은 물론, 왕들의 통치술이나 언행을 기록한 일종의 블랙박스였기 때문에 왕들은 자신의 통치행위가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 것인지 궁금하여 사초(史草)를 몹시 보고 싶어했다.

그 첫 시도를 한 임금은 태조 이성계다.

태조 4년(1395) 6월 9일 태조가 당(唐) 태종의 고사를 본받아 즉위 이래의 사초를 보려 하자 대신들이 ‘옳지 못한 행동’이라면서 극구 반대했고,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도 반대 의견을 제기해 무산되고 말았다.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던 태조는 재임 7년(1398) 5월 1일, 또다시 자신이 왕위에 오른 이후의 사초를 바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대신들 의견은 ‘불가’(不可)였다.

<태조가 사관에게 왕위에 오를 때까지 기록된 사초를 바치게 하고, 도승지 이문화에게 물었다.

임금:“당대의 역사 기록을 군주가 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문화:“역사는 사실대로 바로 써서 숨김이 없어야 하는데 만약 군주와 대신이 이를 보면 숨기고 꺼려서 사실대로 쓰지 못할까 염려한 까닭입니다.”

임금:“당 태종이 역사를 본 일이 있으니, 내가 이를 보고자 하는데 사관이 굳이 거역한다면 어찌 신하 된 도리겠느냐. 마땅히 사고를 열어서 빠짐없이 바쳐야 할 것이다.”>

왕의 거듭된 청탁(?)에 조준 등이 사초를 올리려 하자 사관 신개는 같은 해 6월 12일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예전에 당 태종이 방현령에게 이르기를 ‘앞 시대의 사관이 기록한 것을 임금이 보지 못하게 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니 현령이 ‘사관은 거짓으로 칭찬하지 않으며 나쁜 점을 숨기지 않으니 임금이 이를 보면 반드시 노하게 될 것이므로 감히 임금에게 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태종은 현령에게 명하여 순서대로 편찬하여 올리게 하니 현령이 실록을 편찬하여 올렸지만, 그 내용이 은근히 숨긴 것이 많았습니다. 태종의 현명함으로 보건대 바른 대로 쓰는 일을 싫어하지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령 같은 명철한 재상이 사실을 숨기고 피하여 감히 바른 대로 쓰지 못한 것입니다.

하물며 뒷세상의 군주들은 태종에 미치지 못하면서도 그 시대의 역사를 보고자 한다면, 아첨하는 신하가 어찌 현령처럼 사실을 숨기고 피하기만 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모든 일이 3대를 본받는데, 최근에 특별히 교지를 내려 이 시대의 역사를 보고자 하니 신은 두려워합니다. 당 태종도 뒷세상에 비난을 면치 못했으니 어찌 전하께서 이를 본받으려 하십니까.

창업한 군주는 자손들의 모범입니다. 전하께서 당시 역사를 보시면 후대의 임금이 이를 구실 삼아 ‘우리 선조께서 한 일이다’ 하며 서로 보기를 습관화한다면 어느 사관이 사실대로 기록하겠습니까. 사관이 사실대로 기록하는 필법이 없어져 아름다운 일을 권장하고 나쁜 일을 경계하는 뜻이 어둡게 된다면 한 시대의 임금과 신하가 무엇을 꺼리고 두려워해 자기 몸을 반성하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역사를 보시려는 명령을 정지시키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그러나 태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지금 내가 사초를 보려는 이유는 착하고 악한 행실의 기록을 보려는 것이 아니다. 임신년(1392) 왕위에 오를 때 임금과 신하 사이에 몰래 이야기한 말을 사관이 알지 못한 것이 많다. 이행이 지신사가 되었을 때 그 사실을 기록한 것이 바르지 못했으니, 그 외의 사관이 어찌 임금과 신하 사이에 한 말을 다 알겠느냐. 고려왕조 공민왕부터 이미 편수한 역사와 임신년 이후의 사초를 가려내 바치게 하라.”>

역대 왕조의 정사(正史)의 기초 역할을 하는 사초는 그것을 기록한 사관이 비밀리에 간직하고 있다가 국가에서 요구할 때 제출했다. 사초 수납 방식은 시대와 재임 군주에 따라 약간씩 달랐다. 세종 14년(1432) 5월 17일 춘추관은 ‘사초를 당대에 수납하지 않게 해달라’는 건의를 올렸다.

<“사관의 사초는 임금의 잘잘못과 재상들의 언행, 현실정치의 아름다움과 악함을 기록한 것입니다. 만약 당대에 이런 내용이 적힌 사초를 거두어들인다면 착하고 밝으신 임금의 시대에는 의심할 만한 것이 없어도 펴보실 때 사초 때문에 죄를 받을 것을 두려워해서 사관이 직필(直筆)로 기술하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는 당대에 사초를 수납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사초의 보관도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사초를 보관하다 잃어버린 자에게는 은 20냥을 징수하고 금고(관리에 임용될 자격을 정지시키는 법)에 처하도록 법률로 명시해 놓았다. 그런데 화재나 천재지변으로 사초가 불에 타는 사건도 가끔 발생했으니, 그 정황이 세종 7년(1425) 5월 24일에 발견됐다.

<양녕대군 이제가 사람을 시켜 쪽지 편지를 올렸다.

“신의 처부(장인) 이한로가 지난번 집에 화재가 발생해 사초를 태워버렸기 때문에 조정에 올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조정에서 백은 20냥쭝을 바치게 하고 그 자손을 금고했는데, 백은은 준비할 수 있으니 자손에 대한 금고는 특별한 은전이 있기를 바라나이다.”>

임금은 친형의 부탁이라도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도울 수 없었는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태종실록을 편찬할 때를 맞아 춘추관에서 옛 법에 따라 시행하는 것인데, 사초를 바치지 않은 자는 벌을 받아 마땅하다. 어찌 사사로운 감정으로 공법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세종 27년(1445) 11월 19일에는 춘추관에서 이미 간행된 역대 왕들의 실록을 보관하는 문제로 보고를 올렸다. 춘추관에서 아뢰기를 “태조실록 15권, 공정왕실록(정종) 6권, 태종실록 36권을 네 본씩 썼사오니 한 본은 춘추관 실록각에 간직하고, 나머지 세 본은 충주·전주·성주 사고에 나누어 보관하게 하소서”하고 보고하여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때부터 실록은 네 부를 각각의 국가 문서보관소에 나누어 보관해 후세에 전해주었다.

세종 31년(1449) 3월 2일에는 사관으로서 사초를 훔치거나 그 내용을 발설한 자는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춘추관에서 아뢰었다.
“사초는 그 내용이 지극히 중요하여 다른 문서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 보관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료 관원 중에 이 사실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자는 한 등급 강등, 친척과 친구의 청을 듣고 기록을 없애거나 훔친 자, 내용을 도려내거나 긁어 없애거나 먹으로 지우는 자, 사초 내용을 외부 사람에게 누설한 자는 참수해야 합니다.”>

사초나 기록의 엄정 중립을 추구했던 세종도 은근히 사초와 실록을 보기를 원했다. 그 이유는 아버지 태종이 집권 과정에서 형제들을 많이 죽였고, 양녕대군을 폐세자한 후 자신이 왕위에 오른 사실을 사관들이 어떻게 기록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세종 13년(1431) 3월 20일, 임금은 신하에게 넌지시 이런 질문을 던진다.

<임금:“전대(前代)의 제왕들이 선왕(先王)의 실록을 보지 않은 사례가 없는 것 같다. 태종께서 태조실록을 보지 않으셨는데, 이때 하윤 등은 이를 보는 것이 옳다 하고 변계량은 보지 않은 것이 옳다 하여 태종께서는 변계량의 논의를 따랐다. 이제 춘추관에서 태종실록을 편찬했으니 내가 한번 보려는데 어떤가.”

맹사성:“전하께서 만일 이를 보신다면 후세 임금이 반드시 이를 본받아 (실록을) 고칠 것이며, 사관도 군왕이 볼 것을 의심하여 사실을 다 기록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그 진실함을 전하겠습니까.”

임금:“과연 그렇구나.”>

세종대에 왕이 실록을 보지 못한다는 원칙이 수립된 이래 그 전통을 무너뜨린 왕은 한 사람도 없었다. 연산군이 일기와 사초를 들춰보고 사화(士禍)를 일으킨 적이 있지만 실록은 건드리지 못했고, 사초도 일부 내용을 추린 것만 열람했을 뿐이다.

 

 

사초에 이름을 쓰느냐 마느냐로 논쟁

 

예종 1년(1469) 4월 11일에는 사초에 기록자의 이름을 쓰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임금과 대신들이 논란을 벌였다.

<장계이:“역사는 직필을 귀하게 여깁니다. 지금 춘추관의 사초를 거두어 놓고 각각 이름을 사초에다 쓰도록 했는데, 사초는 국가의 일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사대부의 선악도 모두 기록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초에 이름을 쓰게 하면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직필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임금:“옛사람들도 사초에 이름을 쓰지 않았느냐.”

장계이:“옛사람이 사초에 이름을 썼다는 것은 신이 몰랐습니다.”

임금:“전조(고려)에 한 사람이 임금을 모시고 있었는데 임금이 일어나 춤추라고 명하니 ‘술에 취해서 춤을 출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물러나서도 취기가 없어 임금을 속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너도 지금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았다가 심문에 못 이겨 실토하면 정직하지 못한 신하다.”

성숙(편수관):“얼마 전 원숙강이 ‘사초에 이름을 써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이 말이 임금께 알려진 것입니다.”

이에 임금이 원숙강을 불러 물어보았다.

원숙강:“신이 춘추관에 나가면서 사초를 보니 모두 사관의 이름을 써놓았는데, 신의 생각에 이와 같이 하면 원망을 들을까 두려워 직필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동료와 의논하여 아뢴 것입니다.”

임금:“너는 어찌 문견이 없으면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느냐. 사초에 이름을 쓰는 것은 우리 조정에도 있었던 일인데 그때 서명 여부를 너희들이 어찌 듣지 못했느냐.”

임금은 장계이와 원숙강을 의금부에 가두게 했다가 곧 방면하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언로(言路)가 막힐까 두려워 용서한다” 했다.>

사초에 이름을 쓰느냐 마느냐의 논쟁이 여기서 일단락된 것은 아니다. 같은 해 4월 24일 춘추관에서 세조실록을 편수하면서 사초를 거두었는데, 이 문제가 다시 거론됐다.

<춘추관에서 혹자가 말하기를 “사초에 이름을 쓴다면 직필하지 못할 것입니다” 했고, 혹자는 “예전부터 사초에 이름을 썼으니 안 쓸 수가 없습니다” 하여 드디어 이름을 쓰게 했다.

이때 민수라는 사람이 사초에 대신들의 비행을 많이 기록했는데, 사초에 이름을 쓴다는 말을 듣고는 두려운 마음에 강치성을 시켜 사초를 몰래 내다가 지우고 고쳤다. 최철관이 민수가 양성지의 기록을 고쳐 쓰는 것을 보고 양수사에게 말하기를 “이 일이 누설되면 우리는 죄를 피할 수 없다” 하여 양수사가 수찬관 이영은에게 밀고했다.

이영은이 크게 놀라 여러 동료들과 확인해 보니 지우고 고친 곳이 여러 곳이었다. 이에 민수가 고친 곳을 모두 적어 임금에게 “민수가 사초를 몰래 내다가 고쳤으니 국문해야 합니다”하고 보고했다.

한명회:“민수가 처음에 ‘신(한명회)이 강효문과 더불어 불궤(당연히 지켜야 할 도리나 법도에 어긋남)를 도모했다’고 썼다가 지웠는데, 지금 사초가 제출되지 않은 것이 많아 후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임금:“당시 세조의 전지는 매우 자상하여 내가 일기에 써두었으니 경은 의심치 말라.”

임금이 민수의 집을 수색하도록 했는데 종이를 태운 재가 있어 이존명이 이 사실을 보고하자 민수를 잡아오라고 했다.

임금:“네가 사초를 고치고 삭제했느냐.”

민수:“그렇습니다.”

임금:“어떤 사람을 시켜 사초를 빼냈느냐.”

민수:“강치성에게 부탁해 빼냈습니다.”

이때 강치성은 부모의 병 때문에 죽산현에 가 있었는데 의금부에서 잡아오라고 했다.

임금:“(민수에게) 네가 고치고 삭제한 것은 어떤 내용이냐.”

민수가 하나하나 진술한 후 말하기를 “이들 사항은 신이 듣고 쓴 것입니다. 이제 다시 생각해 보니 역사란 만세에 전해지는 글인데 전해들은 일을 망령되게 기록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고치고 지웠습니다” 했다.

임금:“너는 어찌해서 전해 들은 일을 썼느냐. 인군의 일도 전해 듣고 쓰느냐.”

민수:“(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기를) 사초를 바칠 기한이 닥쳐 미처 수정하고 고칠 시간이 없었습니다.”

임금:“민수의 사초는 지우고 고친 것뿐 아니라 태운 흔적도 있으니 모두 물어보라.”>

민수는 끌려가기 직전 임금의 성질이 매우 곧은 것을 알고는 자결하려 했으나 집안 사람이 극구 말리는 바람에 그만두었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

 

원래 사초란 사관(史官)이 작성하여 비밀리에 자기 집에 간직했다가 당대 임금이 죽고 난 후 실록(實錄)을 편찬하기 위해 실록청이 만들어지면 제출하는 것이기에, 익명성이 보장되는 것은 당연했다. 누가 어떻게 기록했다는 사실을 알면, 후환이 두려워 직필(直筆)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런데 사초에 작성자의 이름을 기록하여 제출하라는 명령이 하루 아침에 내려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목적이 가장사초(家藏史草)가 주 대상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사초 실명제 실시는 그 이후 사관들의 직필 분위기를 완전히 꺾이게 만드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실록을 편찬할 당시 임금이 그의 선왕(先王)에 대한 행적을 사관들이 어떻게 평가했을까 하는 두려움과, 그 선왕이 재임할 때 같이 손발을 맞췄던 신료들의 동병상련으로 만들어낸 공동작품이다. 따라서 사초 실명제를 놓고 사관들과 군왕이나 대신들 사이에서 신경전이 날카롭게 전개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고려시대에도 간혹 사론(史論) 중에는 작성자 이름이 밝혀져 있는 것이 있다. 이로 미루어 고려시대에서도 사초를 실명으로 제출한 경우들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조선 초기에도 한때 사초에다 이름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정종실록」에서 길재(再)의 인물평인 사론에 작성자인 사관 홍여강(洪汝剛)의 실명이 나타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수천 개의 사론 중에서 유일하게 사관 이름을 명시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조선시대 사초 실명제는 명확한 지침없이 왔다갔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사초 실명제로 사화의 소용돌이가 크게 일어난 사건이 '민수(閔粹)의 사옥(史獄)'이다.

 

세조에 이어 즉위한 예종은 그의 부왕에 대한 사관들의 기록에 대해 매우 많은 관심을 가졌고, 세조 당시의 공신(功臣)들 또한 여기에 동조하면서 갑자기 실명제 명령이 내려졌다. 세조 통치기간 동안 사관으로 활약했던 민수는 마침내 제출했던 사초를 도로 가져와 수정했다가 발각되어 동료들은 처형되고, 그 또한 귀양길에 오르면서 사화가 마무리되었다. 민수에 의해 사초 내용이 수정되었다는 여섯 군데를 한번 보기로 하자.

 

첫째는 양성지에 관한 내용이다.

 

"사헌부의 관원이 옥사를 다스리다가 모두 좌천되었다. 처음에 부상(富商) 수인(數人)이 있어 재화(財貨)를 다투다가 송사가 일어나자 헌부로 하여근 안치(按治)하게 하고, 임금이 친히 송사의 상황을 물으니, 사헌부 집의 이숭원 등이 대답을 잘못했으므로, 즉시 하옥시켰다가 잠시 후 용서했는데, 대사헌 양성지는 홀로 구용(苟容)하여 그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대로 재직했다〔司憲府員 以治獄 皆左遷 初有富商數人 爭貨發訟 下憲府按治 上親問訟壯 執義李崇元等 失對卽下獄 尋赦之 大司憲梁誠之 獨以苟容 不與其事 仍在職〕' 라고 썼는데, 뒤에 '구용(苟容)' 2자를 삭제했다."

 

당시 송사가 일어나 이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대사헌 양성지도 연관되었던 모양인데, 양성지가 '구차하게 용서되어', 혹은 '구차하게 용서를 빌어' 란 내용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이 사건으로 성종 때까지 양성지는 대간(諫)의 탄핵을 받는 등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두번째는 홍윤성에 관한 내용이다.

 

"'인산군 홍윤성이 아비 상중에 기복(起復)되어 함길도절제사가 되었다. 그때 일찍이 한 집에 이르러 잠을 자니, 그 집주인이 우리 처녀를 간통했다고 고소하므로, 홍윤성을 하옥하여 추핵했는데, 그 집주인은 무고로 죄를 받게 되었으며, 마침내 홍윤성이 그 처녀를 데리고 사는 바가 되었다〔仁山君 洪允成 居父喪起復 爲咸吉道節制使 其時嘗至一家宿 其家人奸我處女 發訴下允成 獄推之 其家人坐誣訴 竟爲允成所畜〕' 라고 썼는데, 뒤에 '거(居)'자로부터 '시(時)'자까지를 삭거(削去)하고, 여기에다가 '승취(乘醉)' 2자를 첨부해 넣엇으며, '좌(坐)'자부터 '축(畜)'자까지를 지워 없앴다."

 

홍윤성에 관한 것은 "아비 상중에 기복되어 함길도절제사가 되었다"를 삭제하는 대신 "술에 취하여"를 첨가했고, 또 "무고로 죄를 받았고, 마침내 홍윤성이 그 처녀를 데리고 사는 바가 되었다"를 지웠다는 것이다. 당시 관료가 상을 당하면, 3년상을 치르는 동안 관직을 떠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3년 후에 임금의 부름을 다시 받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조 유교사회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례를 깨고 홍윤성은 부모상중에 함길도절제사로 임명되었고, 함길도로 파견되던 길에 그런 행각을 벌였기에 민수는 사초에다 올렸던 것을 다시 지웠던 것이다.

 

셋째는 윤사흔에 대한 내용이다.

 

"'윤사흔이 술기운을 부려 취하면 문득 용렬한 언사로 남을 욕되게 했다〔尹士昕 使酒 醉則輒庸言辱人〕' 라고 썼는데, 뒤에 '사(使)'자를 제거하고, '기(嗜)'자를 고쳐 써넣었다."

 

'사(史)자는 사역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니, 일부러 술기운을 빌렸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 표현을 완곡하게 하기 위해 '즐기다' 혹은 '좋아하다'의 표현인 '기(嗜)'자로 고쳤다는 내용이다.

 

넷째는 신면 형제에 관한 것이다.

 

"'전첨(典籤) 신정이 건너뛰어 승진하여 예문관 직제학이 되었는데, 현 신면은 도승지로서 전형(銓衡)에 관한 일을 상주했으며, 안상계(安桑鷄)를 전첨으로 삼았다〔田籤申瀞 超遷爲藝文直提學 時瀞兄 爲都承旨 掌奏銓衡 以安桑鷄典籤〕' 라고 썼는데, 뒤에 '시(時)'자부터 '첨(籤)'까지를 삭거했다."

 

신정에 품계를 건너뛰어 초고속 승진했던 것은 도승지로 있던 그의 형 신면이 임금께 아뢰어 가능했다라는 사실을 지웠던 것이다.

 

다섯째는 김국광에 관한 사항이다.

 

"'김국광은 성품이 절개가 없어 소절(小節)에 구애받지 아니했고, 탐욕스럽다는 이름이 많았다〔金國光性無介不拘小節貪名多〕' 라고 썼는데, 뒤에 '무(無)'자부터 '다(多)'자까지를 삭거하고, '통편(通徧)하여 설설(屑屑)한 것을 가지고 어짐을 삼지 않았고, 오래도록 권좌에 있어 비방이 많았다〔通徧不以屑屑爲賢 久權多訪〕' 라고 고쳐 썼다."

여섯째는 신숙주와 한명회에 관한 사항이다.

"이때 이시애가 거짓으로 신숙주·한명회가 강효문과 더불어 불궤(不軌)를 함께 도모했다고 했다〔時李施愛詐 以申叔舟韓明澮 與康孝文 同謀不軌〕' 라고 썼는데, 뒤에 '불궤(不軌)' 2자를 지우고 '위난(爲難)' 2자로 고쳐 썼다."

함경도절도사 강효문은 당시 길주 이북 땅에서 가렴주구(求)의 대명사로 통했다. 이시애가 반란군을 끌어모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켜 역공을 취하기 위해 세조가 가장 신임하는 신숙주와 한명회를 끌어들인 것이다. 민수는 사초에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불궤(不軌)라는 표현을 한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불궤란 반역을 도모했다는 뜻이다.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킬 때 한명회와 신숙주를 끌어들였다는 것이 거짓으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반역에 관계되는 단어를 함부로 쓰는 것은 일종의 금기였던 것이다.

민수의 사초 수정사건이 발각되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예종은 친국을 실시하였고, 여러 관련자들이 처벌을 받았다. 민수에게 몰래 사초를 내준 강치성은 임금을 속인 죄로 참형에 처해졌다. 민수처럼 사초를 고친 원숙강도 참형에 처해졌다. 실록청 담당자이던 최명손·이인석은 장(杖) 1백 대에 변방으로 충군(充軍)시켰다. 그런데 민수는 장 1백 대에 제주도 관노비로 소속시킬 따름이었다. 예종이 세자로 있을 때 민수는 서연관(官)이었다. 그러니 그의 스승격이 아닌가. 예종이 물을 때마다 눈물로써 대답하고, 하나뿐인 아들에 늙은 부모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이 참작되어 사형을 면했던 것이다.

이후 연산군과 중종 때에는 사관들이 위축된 시기였다. 김일손 사초에서 비롯된 무오사화(戊午史禍) 때문에 과거 급제자들이 사관으로 나가는 길을 기피할 정도로 매력없는 직업이 된 것이다. 당연히 이때에도 사초 실명제를 놓고 갈등이 계속되고 있었다. 사관들은 간관(諫官)들이 임금 면전에서 직간을 하지 못한다고 틈나는 대로 비난했지만, 사초 실명제를 두고서는 의견을 한데 모을 수 있었다. 그것은 오로지 직필을 소중히 하자는 대의명분과, 같은 뿌리의 사림(士林) 출신들인 사관을 보호하자는 차원이었다.

 

인종이 즉위하자 사간원에서 춘추관에 보관하는 시정기(時政記)처럼 가장사초 또한 이름을 적지 말아야 한다고 요구하고 나섰고, 인종이 한때 이를 받아들인 적이 있으나 명종대에 들어가 몇몇 대신들의 반대로 다시 실명제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오늘날 자기들의 떳떳하지 못한 행위를 숨길 목적으로 자료들을 인멸시키는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후환이 없도록 사초는 세초(洗草)

모든 사관들이 기록의 엄정함과 직필정신을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관도 인간인 만큼 잘못 기록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성종 23년(1492) 1월 28일 승정원에서 형조판서 이계동에게 사초를 보여준 정자당의 처리 문제로 임금과 대신들이 의견을 나누었다.

<승정원:“형조판서 이계동이 ‘북정일기’의 착오된 곳을 개정하자고 청하자 허락하셨는데, 이는 정자당이 제멋대로 일기를 보였기 때문에 잘못된 부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계동이 무엇을 근거로 그 착오를 알았겠습니까. 사관이 기록한 것을 대신이 보고 고칠 수 있다면 자기에게 해로운 내용이 있을 경우 고치려 들 것입니다.”

임금:“내가 일찍이 ‘북정일기’를 보니 내가 한 말을 쓰지 않기도 했고, 하지도 않은 말을 쓰기도 했다. 역사라는 것은 진실한 것을 전해 고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인데 지금 그릇된 것만 고치자는 것이지 사초 전체를 내보인 것이 아니니 고친들 무슨 해로움이 있겠느냐.”

권경희(우승지):“이계동의 말을 들으니 정자당이 사초를 보여준 것 같습니다. 나라의 역사를 사사로이 남에게 보이는 것은 죄가 크니 국문해야 합니다.”

임금:“사초를 내보인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말이다. 사헌부에게 국문하도록 해라.”>

사초는 실록 편찬의 원 사료에 해당한다. 따라서 해당 군주의 실록이 완성되면 실록찬수에 동원했던 사초는 깨끗이 물에 빨아 새 종이로 재생했다. 그런데 경종 4년(1724) 4월 27일에는 찬수를 마친 사초를 물에 빨지 말고 따로 보관하자는 보고가 올라왔다.

<봉교(임금의 명령 출납을 맡아보던 예문관 소속의 정7품 벼슬) 윤상백이 상소했다.
“실록을 찬수할 때 도청 당상이 사관이 기록한 사초를 가져다 마음대로 넣거나 빼고 실록 찬수를 마친 후에는 그 사초를 탕춘대의 물 위에 흩어버리고 이것을 세초(洗草)라 했습니다. 이처럼 당시 사실이 다 없어지면 후세에 다시 알아볼 길이 없어집니다. 설령 도청 직임을 맡은 관원이 모두 군자이고 그들의 선택으로 취하고 버림이 지당하다 해도 사관의 원초만은 장구히 보관해 두고서 누락된 부분을 보충한다면 나쁠 것이 없습니다.

수찬을 맡은 자가 어질지 못하면 사초를 뽑는 데 공정한 마음으로 하지 못하여 버리고 취하는 것이 정당하지 못한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이제부터는 찬수를 마친 후 사초를 한 궤짝에 담아 실록과 함께 명산에 보관하소서.”>

그렇다면 실록 편찬이 끝난 후 사초를 세초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영조 3년(1727) 11월 25일, 이 문제로 어전(御前)에서 난상 토론이 벌어졌다.
실록청 당상 윤순이 “얼마 전 윤상백이 예문관에 있을 때 세초하지 말자는 의견이 있었는데, 아직 결정을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임금이 각 대신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광좌(영의정):“사초는 공정한 말과 강직한 필법이 많으니 세초하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윤순:“개국 초기에는 세초의 규정이 없었는데 선조실록을 찬수할 때 대북 당인들이 전적으로 주관하여 그들의 판단에 의해 편찬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훗날 다른 의견이 나올 것을 염려해 세초를 시작했던 겁니다.”

임금:“세초하는 것은 원래 그 뜻이 있는 것이다. 사초 가운데 한때의 취사선택을 어떻게 모두 다 올바르게 할 수 있겠는가. 혹은 보고 들은 것이 달라 시비를 다투는 폐단이 있을 것이다. 말 많은 세상에서 세초를 하지 않는다면 불온한 말들을 어떻게 진정하겠는가. 세초하는 것이 옳다.”>

그리하여 사초는 말썽의 소지를 없앤다는 차원에서 세초하는 것을 관례로 삼았다.



임금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은 불경죄

영조 3년(1738) 2월 25일에는 사관들이 역사기록을 빙자하여 임금의 얼굴을 쳐다본 사건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이 시대는 왕이 곧 하늘이요 태양이었으니 신하는 왕의 명치 위를 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사정이 이러니 어느 누가 임금의 표정을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기록에는 ‘임금이 얼굴을 움직이며 선한 표정을 지었다’고 하고 다른 기록에는 ‘임금의 안색이 변했다’고 적는 폐단이 발생했다. 이에 용감한 사관이 금령을 어기고 왕의 얼굴을 바라본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이에 대한 영조의 답변.

<“옛사람이 이르길 ‘군부(임금)의 얼굴을 모르면 난리를 당했을 때 어떻게 알아보겠는가’라고 했으니 지금 좌사(左史)와 우사(右史)의 말은 옛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다. 이 뒤로 여러 신하들이 우러러보아야 할 일이 있을 적에는 우러러보도록 하겠다.”>

왕에 대한 비판을 서슴없이 행하던 사관들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인지라 왕 앞에서 깜빡 조는 일도 있었다. 세종 7년(1425) 4월 16일의 해프닝이 그 사례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사관 이호문은 아침 조회 때 앉아서 졸았사오니 법률에 따라 죄를 주소서” 하자 논하지 말라고 명했다.>

오늘날 청와대에도 조선시대의 사관과 비슷한 통치사료 담당관이 있지만 문제는 이들이 대통령과 고위 각료들의 언행, 정책 입안 과정에서 오간 극비사항들을 기록할 수 있는 권한이 조선시대의 사관에 비해 현저하게 줄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당대의 역사를 후손에게 물려줄 아무런 제도적 장치를 가지지 못한 셈이니, 역사 기록에 관한 한 오늘의 우리는 조선시대보다 훨씬 후퇴한 셈이다.

 

출처 : 월간조선 [김용삼의 조선왕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