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의향기

부처님 가르침, 처음부터 수행이었다

파라리아 2009. 11. 15. 14:07

부처님 가르침, 처음부터 수행이었다.


                                              ㅂ힉쿠  붇ㄷ하빠라 스님



  부처님 가르침은 처음부터 수행이었고 수행이 전부였다. 부처님은 마음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변화시키는 과정을 수행이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은 처음부터 수행이었고 수행이 전부였다. 부처님은 마음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변화시키는 과정을 수행이라고 했다.


  오염된 마음을 맑히고, 피곤하고 무기력한 마음을 활기차고 건강하게, 산만한 마음을 평화롭고 고요하게, 슬픈 마음을 행복한 마음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을 수행이라고 한다.


  수많은 출가 재가의 불교도가 있지만 수행하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갖가지 핑계와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불교가 수행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왜곡시키거나 망각하고 있다. 말 잘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말이나 글을 비틀더라도 수행이 빠진 불교는 더 이상 불교일수가 없다. 


  목욕탕에 갔는데 물이 없어 목욕할 수 없다면 주인이 고객을 속인 것이듯이, 수행하러 아라마(arama, 精舍, 절)에 갔지만 정작 아라마에 수행할 수 있는 공간이나 수행지도자가 없다면 그 또한 대중을 기만하는 것이다.


  치과에서는 이를 다루고 안과에서는 눈을 치료한다. 아라마는 마음과 행복을 다룬다. 그 중심에 수행이 있다. 아픈 이를 치료할 때는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도구가 필요하다.  환자가 왔는데 사주팔자 뽑고 관상보고 앞으로 이 아픔이 어떻게 전개될 것이라고 점쳐주고 돌려보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점집이지 치과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마음을 건강하게 하여 행복으로 가는 길을 묻고자 온 사람에게 법당에서 부처님께 절을 하라거나,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하라면 그게 어디 무당 굿하는 곳이지 수행처이겠는가?



  마찬가지로 마음을 건강하게 하여 행복으로 가는 길을 묻고자 온 사람에게 법당에서 부처님께 절을 하라거나,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하라면 그게 어디 무당 굿하는 곳이지 수행처이겠는가? 머리나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아스피린만 먹으면 해결된다고 하면 시장 통에서 만병통치약 파는 사람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사람 사는 일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한 일들을 접하면서 그 해결책을 신이나 부처님께 매달리고, 절이나 기도만 하면 해결될 수 있다고 한다면, 어리석은 사람들이 혹세무민하는 곳이지 그게 어디 지혜의 종교라고 할 수는 없다.


  불교가 수행을 핵심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자신의 수행을 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수행을 전해주는 것에 대한 효과적인 측면에 대해서 고민해왔다.


  물건 파는 사람이 소비자를 만나자 마자 제품을 소개하고, 팜프렛을 건네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니다. 이렇게 해서는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 살 사람을 피곤하게 하지 않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공동의 관심사 등을 이야기 하다가 슬며시 팜프렛이나 제품을 소개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한다.

 


  야싸는 마음의 문을 열고 수행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자 부처님은 드디어 본론인 최상설법, 선법문인 고집멸도(苦集滅道)의 4성제(四聖諦)를 닦아, 자유와 행복으로 갈 수 있다고 수행에 대해서 말했다.



 부처님도 그렇게 했다.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처음 아라한뜨 도과를 성취한 후, 그곳으로부터 250km 떨어진 미가다-야(Migadaya, 鹿野園)로 가서, 5섯명의 ㅂ힉쿠들에게 처음으로 수행을 지도했다.


  그곳에서 음력 6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3개월 동안 머물면서 수행을 지도하여 모두 아라한뜨 도과를 성취할 수 있었다.


  이때 야싸라는 젊은이가 부처님을 찾아와서 마음이 괴롭다고 하소연하자 부처님은 야싸에게 수행을 지도했다. 부처님은 곧바로 수행을 이야기 하지 않고 규칙적인 삶(sila, 戒)의 유익함과 방탕한 삶의 무익함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내가 가진 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dāna, 布施)인지와 지나치게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것이 소모적인 삶인지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다.


  야싸는 마음의 문을 열고 수행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자 부처님은 드디어 본론인 최상설법, 선법문인 고집멸도(苦集滅道)의 4성제(四聖諦)를 닦아, 자유와 행복으로 갈 수 있다고 수행에 대해서 말했다.


  부처님은 최상법문, 선법문인 수행을 이야기하기 전에 서론격인 대화를 차제설법(次第說法)이라고 했다. 그러나 오늘날 아라마에 가면 법문이나 지도하는 내용의 거의 전부가 차제설법에 해당하는 계율과 자비행이 주를 이루고 있다.



  차제설법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수행을 끄집어내기 위한 서두에 불과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한평생 아라마에 다녀도 수행은 있는지조차 모르는 불교도가 많다.



운 좋게 수행을 접하게 되더라도 수행은 소수의 상근기만을 위한 것이라거나, 아주 오랫동안 고난의 길을 걸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말하여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하게 만드는 경우를 흔히 본다.


  옛날 중국 어른스님들은 불입차제(不立次第)라는 말을 즐겨 썼다. 그것은 앞서 부처님이 이야기한 서두가 필요 없다는 말이다. 서두는 그만두고 단도직입 직지인심(單刀直入 直指人心), 곧바로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수행하는 것이 좋다고 보았다. 맞는 말이다.


  수행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약간의 서두가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이미 수행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상황에 따라서 차제설법과 불입차제를 적절하게 사용하면서 수행을 소개해야 한다. 우려하는 사항은 어떤 경우에도 수행을 지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된장찌개를 끓이더라도 최소한의 도구가 필요하다. 수행도 마찬가지이다.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도구가 필요하다. 경전에 가장 즐겨 등장하는 도구는 알아차림(sati, 念), 마음집중(samādhi, 止, 定, 三昧), 지혜(pannā,慧)의 3학(三學)과 계(sila, 戒)와 보시(dana, 檀越, 布施) 등이다1).


  여기서 계는 도과를 성취하는데 이르는 길을 안내하는 길라잡이 역할을 한다. 계를 아무리 잘 지켜도 도과를 성취하는 것은 아니다. 계의 기능은 단지 길만을 인도할 뿐이다. 계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난받는 것을 벗어나게 해준다.


  보시, 선행, 덕행, 자비행은 수행을 방해하는 현상을 제거하고 좋은 인연을 맺게 해주는 기능을 한다. 보시행을 아무리 해도 도과를 성취하는 것은 아니다. 도과를 성취할 때까지 직면하게 되는 각종 방해하는 현상을 비켜나게 하고 좋은 인연을 맺게 해주어 수월하게 도과를 성취할 수 있게 해 주는 기능을 한다. 선행을 많이 하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송을 받는다고 한다. 


  옛 어른들 말에 윗대에서 적선(積善)을 많이 하면 후손들이 발복(發福)한다고 해서 즐겨 권장되는 삶의 지혜였다. 오늘날에도 자원봉사 활동과 같은 다양한 선행이 강조되고 있다.



  부처님은 어려운 일이 닥치면 자기 자신의 덕이나 자비심이 부족한 것으로 알아차림하고, 덕을 베풀면서 그 어려움을 극복하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어려운 일이 닥치면 자기 자신의 덕이나 자비심이 부족한 것으로 알아차림하고, 덕을 베풀면서 그 어려움을 극복하라고 말했다. 


  수행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자기 자신의 수행만을 하는 사람을 보면 처음에는 진도가 잘나가는 것 같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부터 수행을 방해하는 것들이 나타나 수행의 기복이 심한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수행자들은 다른 수행자들을 살피고, 대중의 수행을 위해서 남들이 하지 않는 굳은 일들을 처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수행자들은 처음에는 진도가 원하는 것만큼 나가지 않아서 힘들어 하지만 서서히 힘든 상황이 비켜나고, 좋은 인연들이 맺어지면서 수행의 큰 진보가 있는 것을 흔히 본다.



  수행의 도구는 수행과 연관지을 때만이 그 의미가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수행을 제거하고 계나 보시행을 설명하게 되면 그 의미를 왜곡하게 된다.



  수행의 도구는 수행과 연관지을 때만이 그 의미가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수행을 제거하고 계나 보시행을 설명하게 되면 그 의미를 왜곡하게 된다.


  수레바퀴의 원래 사용가치는 짐수레에 사용되는 것이지만, 그것을 전통찻집 주인이 사용할 때는 실내 인테리어 차원에서 접근하게 될 것이다. 수레바퀴의 원래 사용가치를 알고자하는 사람이나, 다른 사람에게 수레바퀴의 사용가치를 설명할 때 본질로부터 벗어나 버리고 전혀 엉뚱한 내용을 설명하게 될 것이다. 물론 본질적으로는 정해진 사용가치는 없지만 현실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수행의 도구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우리는 계를 지켜야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물론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원래 사용가치는 무시하고 단순히 계 조문에만 초점을 맞출 수 없다는 것이다.


  자동차가 많아지다 보면 서로 불편하게 되고, 그 결과 서로 약속을 정해 놓고, 그것을 지키면서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이 편리하다. 우리가 도로교통법을 준수하기 위해서 자동차를 산 것이 아니듯이 계도 마찬가지이다. 수행을 도와주는 보조적인 도구이지 그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계를 지키기 위하여 출가 수행하는 사람은 없다. 수행에 필요하기 때문에 계를 만들고 지키는 것이다. 


  선행도 그와 같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불교도이기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도이기 때문에 자비행을 해야 하고, 그것이 불교도의 의무라고 생각한다면, 하지 않는 것보다야 좋은 일이지만 관점이 잘못된 것이다.



  인과불락(因果不落)이 아니라 인과불매(因果不眛)이다. 복을 쌓았다고 행하지도 않은 일들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위배하는 것이다. 단지 자신이 하는 일의 진행과 흐름, 맥락에 어둡지 않을 뿐이다.



  선행을 하거나 아라마에 보시를 하면 복을 받는다고 하여 많은 불교도들이 보시를 한다. 그러나 복에 대한 개념이 다르다. 부처님이 생각한 복은 마음을 맑히고, 수행의 진보를 가져오고, 좋은 인연이 맺어지고, 삶에 방해하는 대상이 제거되는 그런 종류의 복이었다. 단지 복을 지었다는 이유만으로 부처님이 복을 줄 것이라는 착각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인과법을 벗어나는 것이다.


  백장스님의 말씀이 아니라도 인과불락(因果不落)이 아니라 인과불매(因果不眛)이다. 복을 쌓았다고 행하지도 않은 일들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위배하는 것이다. 단지 자신이 하는 일의 진행과 흐름, 맥락에 어둡지 않을 뿐이다.


  부처님은 수행의 도구로써 다양한 개념들을 사용했다. 후세 불교도들은 해당 개념에서 수행을 배제하고, 그 개념의 의미를 비틀어 전혀 다른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불교도는 경전을 배우기 위하여 아라마에 오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배워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오는 것이다. 출가수행하는 스님들도 마찬가지이다. 경전을 가르치거나 아라마를 경영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을 정화시키기 위하여 출가 수행하는 것이다. 


  불교도는 경전을 배우기 위하여 아라마에 오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배워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오는 것이다. 출가수행하는 스님들도 마찬가지이다. 경전을 가르치거나 아라마를 경영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을 정화시키기 위하여 출가 수행하는 것이다. 


  불교 교단은 수행하기 위해서 모인 집단이다. 그러나 여기도 사람이 모인 곳이라 수행 이외의 일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불교는 수행을 중심으로 결성된 모임이다.


  어떤 사람은 다른 수행자가 편안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재정적⋅ 행정적 뒷바라지를 하고, 어떤 사람은 밥이나 수행도량 관리를 하고, 어떤 사람은 다른 수행자의 수행을 도와주기도 한다. 행위는 다양하지만 핵심은 어디까지나 수행이다.



  물론 사람이 살아가는 데 힘들고 어려운 일이 없을 수는 없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신에게 빌어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답답한 마음을 그렇게라도 표출할 뿐이다.



  불교교단도 사람들의 모임이라 때로는 경조사가 없을 수는 없다. 결혼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만남을 축하해주기도 하고, 죽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장례를 치러주며 그 이별을 가슴아파하기도 한다.


  세월이 흐르고 사람이 늘어나다보니 점차 이러한 일들이 주가 되고, 수행은 뒷전으로 밀려난 것이 오늘날 한국불교와 세계불교의 현실이다. 수행을 하기 위해서 결성된 모임에 정작 수행은 없고 부수적인 일들만 남아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불교 교단의 역할이 수행이 아니라, 각종 통과의식을 치루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봉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에 사람들이 모이고 조직이 결성되면, 사람들의 모임이란 늘 그렇듯이 항상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각종 통과의식이 있게 마련이다. 문제는 그런 통과의식을 치루느라 정작 중요한 봉사활동은 하지 못하고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돌이켜 볼 것이다.


  물론 사람이 살아가는 데 힘들고 어려운 일이 없을 수 는 없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신에게 빌어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답답한 마음을 그렇게라도 표출할 뿐이다.


  그러나 불교도가 언제까지나 절대자에게 매달리기만 하면 그것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고,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자의 태도라고 할 수 없다. 불교도가 그렇게 한다면 기독교와의 차이가 무엇이며 불교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의심스럽다.


  사람 사는 일에 어찌 통과 의식이 없겠는가? 그냥 살아도 되겠지만 그래도 결혼이라는 만남 의식을 치르고 사는 게 삶이다. 죽고 나면 모든 것은 끝나고 삶의 영향력(kamma bala, 業力)만 남겠지만 그래도 오랜 세월 함께 했던 사람들이 모여 이별의식을 품위 있게 치르면서 슬픈 마음을 갈무리하는 것이 사람 사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불교교단의 입장에서는 부수적인 일이고, 어디까지나 수행이 주이다. 수행을 통하여 마음을 맑고 건강하게 하여 자유와 행복으로 가는 것이야 말로 불교의 고유한 일이고 정체성이다. 억지로 비율을 짓자면 수행이 95%이고 나머지 일들은 5% 정도의 비중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주변에 있는 개별 아라마나 불교교단의 활동을 살펴보면, 수행은 찾아볼 수 없고, 거의 90% 이상이 제사나 기도를 위시한 각종 통과의식을 치루는 데 치중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살다 보면 답답할 때도 있을 수 있다. 그 마음을 어쩔 수 없어 신에게 빌어보기도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힘듦의 표현일 뿐이다. 오늘날 아라마에 가면 관세음보살과 같은 신을 모시고 기도하느라 정신이 없다. 뭔가 문제인가? 중생의 욕망인가 아니면 그렇게 하는 스님들의 무지인가? 그 중심에 욕망과 무지가 있는지 자신을 살필 일이다. 


  병원은 아픈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곳이다. 그곳의 시스템을 현대화하고, 서비스가 좋다고 해도 정작 제대로 치료할 수 있는 의사가 없다면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 가장 좋은 경쟁력은 결국 실력이다.



  불교 교단이나 아라마도 마찬가지이다. 교단 규모를 확장하고, 신도 조직을 세련되게 하고, 아라마 시설을 편리하게 한다고 하여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아라마의 본질적 역할이 수행인 이상, 수행이 빠진 상태에서의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하게 된다.



  불교 교단이나 아라마도 마찬가지이다. 교단 규모를 확장하고, 신도 조직을 세련되게 하고, 아라마 시설을 편리하게 한다고 하여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아라마의 본질적 역할이 수행인 이상, 수행이 빠진 상태에서의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하게 된다.



  수행이 빠진 상태에서 교단 규모가 커지고 신도수만을 늘리는 것은 정치 조직화되기 쉽고, 불교 상품의 판매조직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불교 최대의 경쟁력은 수행이다.       



  실용주의를 강조하는 미국의 대학에는 현장 경험이 없는 교수는 채용하기를 꺼린다고 한다. 왜냐하면 현장 경험 없이 단지 책을 통한 지식은 유용성이 떨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가령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교수를 채용할 때는 최소한 한국에서 몇 년 이상 생활한 사람을 우선 채용한다는 원칙이다. 


  불교학도 마찬가지이다. 불교에 있어서의 현장 경험이란 바로 수행이다. 불교가 마음을 다루는 이상, 그 마음속으로 들어가 봐야 마음의 구조와 작용을 이해할 수 있고, 마음의 변화와 통제의 기술을 터득할 수 있다. 그 힘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을 도와줄 수 있다.


  만일 불교를 가르치는 사람이 수행을 통하여 마음을 다루는 방식을 익히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현장 경험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마음은 대학 연구소에서 일반물질을 다루듯이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전 세계 대학들에서 불교를 다루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현장 경험이 없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하버드, 옥스퍼드, 토교, 파리, 베이징, 동국대학 등에서 불교를 가르치는 교수들 거의 대부분이 현장 경험이 전무한 상태이다.



  수행이 빠진 상태에서 교단 규모가 커지고 신도수 만을 늘리는 것은 정치 조직화되기 쉽고, 불교 상품의 판매조직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불교 최대의 경쟁력은 수행이다.



  비단 이러한 현상은 대학에서뿐만 아니라 스님들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승가대학이나 개별 아라마에서 사회 교육원 형태로 개설한 불교대학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곳에서  불교를 가르치는 스님이나 교수들 또한 현장 경험이 없기는 매 일반이다.


  아라마에 산다고 하여 현장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다.  까-싸-야(kāsāya, 袈裟)를 입고 아라마에 산다고 수행을 하는 것은 아니다. 전 세계에 걸쳐서 수많은 사람들이 아라마에 출가 수행자로 살고 있지만, 그 들 가운데 0.1% 정도만이 수행을 한다고 보면 된다.


  현재 한국에서 동국대학교를 비롯하여 불교 관련 과목을 가르치는 스님들과 교수들은 400~500여명 정도 된다. 또 큰 아라마에서 스님들을 양성하는 승가대학이 수십 개에 이르고 그곳에서 스님들을 가르치는 스님들이 200~300여명 정도 된다. 아라마에 개설된 불교대학에서 일반인을 가르치는 스님이나 교수들 또한 상당히 될 것이다.


  그들 가운데 현장 경험이 있는 스님들이나 교수가 얼마나 될까? 3개월 이상 선방에서 수행을 한 스님이나 교수들이 최대치로 잡아서 3%를 넘지 않으리라고 본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이다. 현장 경험이 없는 지도자로부터 불교를 배우다 보니 불교를 배우고 있지만 실상은 불교가 아니라 단지 문자만 배우고 있을 뿐이다. 불교 교수가 아니라 어학 교수라고 이름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이다. 현장 경험이 없는 지도자로부터 불교를 배우다 보니 불교를 배우고 있지만 실상은 불교가 아니라 단지 문자만 배우고 있을 뿐이다. 불교교수가 아니라 어학교수라고 이름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수행이 빠진 상태에서 불교는 배우는 사람이나 가르치는 사람 모두에게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한다. 오늘날 모든 불교학의 침체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불교를 현장 경험이 없는 스승으로부터, 현장 경험이 배제된 채, 단지 현장 경험을 기록해 둔 문자, 즉 경전을 통해서 배우다 보니 수행의 언어인 경전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겉돌고 있다.


  그렇게 불교를 배운 사람들은 자신이 배운 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또 그렇게 가르쳐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불교, 세계불교의 현실이며 역사적 한계이기도 하다. 수행이 배제된 불교는 더 이상 불교일 수가 없다. 그것은 불교의 내용이 수행이기 때문이다.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담당 의사가 옛날 훌륭했던 의사의 일화, 치료했던 행적, 의사에 관련된 자료를 설명하거나, 그 의사의 이름을 부르고, 그 의사의 사진에 절을 한다고 환자의 병이 치료될 것이라고 설명한다면 정상인이라면 그것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불교도는 아라마에 가서 부처님 이름을 부르거나 부처님께 절을 하고, 또 부처님이나 훌륭한 스님들의 행적에 관해서 배우면서 우리들의 문제가 해결되고, 마음이 맑아지며, 수행이 저절로 될 것이라고 가르치거나, 그것을 믿고 따른다면 이 얼마나 한심하고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수행이 빠진 상태에서 불교는 배우는 사람이나 가르치는 사람 모두에게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한다. 오늘날 모든 불교학의 침체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