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의향기

깨달음의 가장 큰 장벽은 그것에 대한 욕망이다

파라리아 2009. 11. 24. 22:52

[질문] 스승님에게 온 이후, 명상적인 삶을 사는 것은 더 쉽고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실재적으로 깨달음에 대한 모든 희망을 포기했습니다.

 

이 관점들은 서로 모순 되지 않습니까?

 

 

 

결코 아니다.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당신은 깨달음에 대한 모든 희망과 욕망을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깨달음에 대한 욕망 그 자체가 하나의 악몽이 된다.

 

당신이 깨달음을 더 욕망할수록 더 깨달음에서 멀어진다. 욕망이 더 클수록 거리는 더 커진다.

 

깨달음에 대한 모든 욕망과 희망을 내려 놓아라.

 

당신이 진실로 깨달음에 대해서 욕망이 없어진다면, 어떤 순간이라도 깨달음은 일어난다.

 

공간을 주라. 그것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차 있지 말라.

 

 

 

깨달음의 가장 큰 장벽은 그것에 대한 욕망이다.

 

왜냐하면 바라고 욕망하는 마음은 항상 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주위에는 미묘한 근심이 있다. 그 마음은 결코 편안하지 않다.

 

당신이 어딘가로 가고 어딘가에 도달해야 한다면 어떻게 편안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앉아 있을지도 모르지만 움직이고 있다.

 

가시적으로 당신은 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비가시적으로는 들떠 있다.

 

모든 넌센스를 내려 놓아라.

 

아무도 욕망을 통해서 결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모든 부처들이 “무욕이 되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당신이 무욕이 될 때 니르바나와 깨달음을 성취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당신이 무욕이 될 때 니르바나이고 깨달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욕망은 당신 속의 혼란이다. 그건 마치 호수의 물결과 같다.

 

물결이 사라지면 호수는 고요하다.

 

 

 

세속적인 욕망들을 버리는 것은 아주 쉽다. 사실 그것들에 집착하는 것은 전적으로 어리석다.

 

오직 어리석은 사람들만이 세속적인 것들에 집착한다.

 

어느 누구라도 그것들이 당신에게서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집착은 쓸모없고 헛되다.

 

약간의 지성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사물을 축적하는 것이 당신에게 풍요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다. 

 

아니, 그것은 당신을 더욱더 가난하게 만든다.

 

당신이 더 많은 것들을 소유할수록 자신이 더욱 텅비어있음을 느낄 것이다.

 

부유한 사람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아주 가난하다.

 

당신은 황제보다 더 위대한 거지를 찾을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이 욕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처음으로 내면에서 어떤 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전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혼란이다.

 

그 모든 노력이 쓸모없고 그 모든 삶이 그 속에서 낭비되었다.

 

 

 

아니,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당신이 세속적인 욕망을 버릴 때 즉시 마음은 탈속적인 욕망을 창조한다. 모크샤와 니르바나와 깨달음과 신을.

 

이제 당신은 그것들을 갈구한다.

 

상황은 전과 다름 없다. 당신은 욕망 속에 머물러 있다.

 

대상은 상관없다. 진정한 것은 당신이 욕망하는가 욕망하지 않는가이다.

 

진정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욕망하는가가 아니다.

 

모든 당신의 영적인(소위 영적인)교사들은 당신을 오도한다.

 

그들은 계속 “욕망의 대상을 바꾸어라. 세속적인 것들을 욕망하지 말라. 신을 욕망하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말한다. 당신이 신을 욕망하면 신이 하나의 세속적인 것이 된다.

 

나에게는 이것이 세속의 정의이다. 욕망될 수 있는 것은 모두 세속이다.

 

 

 

신은 욕망될 수 없다. 당신은 신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그것은 신성모독이다.

 

깨달음은 욕망될 수 없다. 깨달음은 오직 욕망이 없을 때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외부에서 오는 어떤 것이 아니다.

 

마음이 욕망에서 자유로울 때, 갑자기 당신은 내면에 앉아 있는 왕 중 왕을 자각하게 된다.

 

그는 항상 거기 있었지만, 당신은 욕망과 도달과 성취와 획득으로 너무도 근심했다.

 

성취하려는 마음이 장벽이다.

 

그래서 당신은 깨달음에 대한 모든 희망을 포기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모든 희망을 포기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더라면 깨달음은 일어났을 것이다.

 

당신이 옳을지도 모른다.

 

 

 

실재적으로 당신은 깨달음에 대한 모든 희망을 포기했다.

 

하지만 깊은 곳에서 당신은 여전히 깨달음을 꿈꾸고 욕망하고 있다.

 

실제적으로 당신은 포기했지만 깊은 곳에서 그 욕망이 존재함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왜 깨달음이 일어나지 않는가의 질문도 없다.

 

그것은 즉시 일어나야 한다. 거기 한 순간의 틈도 없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욕망이 완전히, 전적으로 당신을 떠날 때 깨달음은 거기 있다.

 

사실 깨달음은 다름이 아니라, 욕망없는 당신이다.

 

그러므로 당신 자신의 내면을 깊이 탐구하고 조금 더 깊이 파라.

 

당신은 다시 욕망의 층들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들을 계속 던져라.

 

양파의 속까지 껍질을 벗기라.

 

 

 

어느날 그것은 일어날 것이다.

 

언제라도 그것은 가능하다.

 

어떤 순간이라도, 욕망이 없고 어른거리는 욕망의 깜박임조차도 없고 어떤 동요나 물결침도 없고, 의식에 구름이 없고

 

욕망의 연기도 없고, 오직 의식의 불꽃과 의식의 불이....

 

갑자기 당신은 웃기 시작한다.

 

갑자기 당신은 자신이 찾고 있었던 것이 항상 내면에 있었음을 이해한다.

 

그것이 예수가 “하느님의 나라는 당신의 내면에 있다”고 계속 말하는 의미이다.

 

그것이 외부에 있었다면 욕망될 수 있다. 그것이 외부에 있었다면 어떤 길에서 도달될 수 있다.

 

그것은 당신이다!

 

그 때문에 나는 당신에게 제공할 어떤 길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오직 나의 이해를 당신과 함께 나눌 수 있을 뿐이다.

 

 

 

-오쇼 라즈니쉬, 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에 대한 강의/ 요가 영혼의 과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