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1 대상들은 단지 명명될 수 있을 뿐이다. 기호들은 그것들을 대표한다. 나는 대상들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을 뿐, 대상들을 언표(言表)할 수는 없다. 명제는 사물이 어떻게 있는가를 말할 수 있을 뿐, 사물이 무엇인가를 말할 수는 없다.
4.003 철학적인 것들에 관한 대부분의 명제들과 물음들은 거짓이 아니라, 무의미하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물음들에 대해 결코 대답할 수 없고, 다만 그것들의 무의미성을 확립할 수 있을 뿐이다. 철학자들의 물음들이나 명제들은 대부분 우리가 우리의 언어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그것들은 선(善)이 미(美)보다 다소 동일한가 하는 물음과 같은 종류이다.)
그리고 가장 깊은 문제들이 실제로는 아무 문제도 아니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4.0031 모든 철학은 "언어 비판"이다.
4.114 철학은 생각될 수 있는 것에 한계를 그음과 동시에, 생각될 수 없는 것에 한계를 그어야 할 것이다.
철학은 안으로부터, 생각될 수 있는 것을 통하여, 생각될 수 없는 것을 한계지어야 할 것이다.
4.116 좌우간 생각될 수 있는 모든 것은 명료하게 생각될 수 있다. 언표될 수 있는 모든 것은 명료하게 언표될 수 있다.
5.6 나의 언어의 한계들은 나의 세계의 한계들을 의미한다.
6.432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는 더 높은 존재에게는 완전히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신(神)은 자신을 세계 속에서 드러내지 않는다.
6.44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6.5 언표될 수 없는 대답에 대해서는 물음도 역시 언표될 수 없다.
수수께끼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물음이 좌우간 제기될 수 있다면, 그 물음은 또한 대답될 수도 있다.
6.52 우리는, 비록 모든 가능한 과학적 물음들이 대답된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의 문제들은 여전히 조금도 건드려지지 않은 채로 있다고 느낀다. 물론 그렇다면 과연 아무 물음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대답이다.
6.521 삶의 문제의 해결은 삶의 문제의 소멸에서 발견된다.
(이것이, 오랫 동안의 회의 끝에 삶의 뜻을 분명하게 깨달은 사람들이 그 뜻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말하지 못한 이유가 아닐까?)
6.522 실로 언표 불가능한 것이 있다. 이것은 스스로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6.53 말해질 수 있는 것, 따라서 자연 과학의 명제들 - 따라서 철학과는 아무 상관 없는 어떤 것 - 이외에는 아무 것도 말하지 말고, 다른 어떤 사람이 형이상학적인 어떤 것을 말하려고 할 때는 언제나, 그는 그의 명제들 속에 있는 어떤 기호들에다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못하였음을 입증해 주는 것, - 이것이 본래 철학의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 이 방법은 그 다른 사람에게는 불만족스럽겠지만 - 그는 우리가 그에게 철학을 가르쳐 주었다고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 이 방법은 유일하게 엄격히 올바른 방법이다.
6.54 나의 명제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해명한다: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만일 그가 나의 명제들에 의하여 - 나의 명제들을 딛고서 - 나의 명제들을 넘어 올라간다면, 그는 결국 나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는 말하자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한다.)
그는 이 명제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본다.
7.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된다.
- 『논리-철학 논고』,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1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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