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 "명상 속에 있는 것과 명상을 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명상을 하고 있다면, 그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려 애쓰고 있는 것이다.
그가 무엇을 하겠는가? 그는 자신의 마음이 고요해지도록 만들려 시도할 것이다.
한 사람이 명상 속에 있을 때, 그는 자신의 마음이 고요해지도록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도 마음으로부터 빠져나오고 있는 것이다.
태양이 너무 뜨거워서 괴로울 때 그대는 사람들이 양산을 펼치는 것을 볼 것이다. 밖에 태양 아래서는 양산이 펼쳐질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 그늘 아래, 또는 다른 어떤 것의 그늘 아래 서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양산은 마음 안에서는 결코 펼쳐질 수 없다. 그 곳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보호책은 오직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 그리고 그것은 아무런 차이도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태양 아래 눈을 감고 서서, 양산이 자신의 머리 위에 있으니 이제 뜨겁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뜨거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 사람은 무언가를 행하려고 하고 있다. 그는 태양을 식히려고 하고 있다. 그는 명상을 ‘행하려고’ 하고 있다.
이제 또 다른 사람이 있다. 바깥에 햇볕이 심할 때 그는 그저 일어서서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가 쉰다.
그는 태양을 식히려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태양으로부터 물러난다.
명상을 한다는 것은 노력을 한다는 것을, 마음을 바꾸려는 노력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명상 속에 있다는 것은, 마음을 바꾸려는 아무런 노력 없이, 그 대신에 소리 없이 안으로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는 이 두 가지 사이의 차이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만약 그대가 명상을 하려는 노력을 한다면 명상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의식적인 노력을 하려고 한다면 - 앉아서 근육을 긴장시키고, 자신을 강요하고, 어떻게든 그대의 마음을
진정시키겠다고 결심한다면 - 그것은 결코 소용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누가 이 모든 것을 하고 있게 될 것인가? 누가 결심을 할 것인가? 그대 말고 누가 있는가?
그렇지 않아도 그대는 이미 혼란스럽고 불안하다. 그런데 그대는 자신을 진정시키려 노력한다.
그것은 그대가 또 하나의 두통을 더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는 모든 것을 무시한 채 딱딱하고 긴장된 상태로 앉아 있다.
그대가 뻣뻣해질수록 그대는 더 어려움에 빠진다. 그대는 계속해서 점점 더 긴장되어 간다.
이것은 방법이 아니다. 내가 그대에게 명상을 하라고 하는 것은 명상은 이완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단지 이완되어 있으라.
그대의 이해를 확실히 하라.
한 가지 작은 예를 들어 조금 더 설명하려 한다. 이것을 하나의 근본적인 기준으로 삼아라.
한 남자가 강에서 헤엄을 치고 있다.
그는 강 건너편에 도달하고 싶다고 말한다.
강의 물살은 빠르고, 그는 헤엄쳐 건너기 위해 팔과 다리를 휘젓는다.
그는 힘들고 지쳐서 기운이 빠지지만 계속 헤엄을 친다.
이 사람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헤엄을 치는 것은 하나의 노력이다. 명상을 하는 것도 하나의 노력이다.
이제 또 다른 사람이 있다.
그는 헤엄을 치는 대신 단지 떠 있기만 한다. 그는 강물 속에 자신을 맡긴 것이다.
그는 팔과 다리를 휘젓지 않는다. 그는 단지 강물 속에 누워있다.
강물은 흐르고 있고 그 역시 흐르고 있다. 그는 전혀 헤엄치고 있지 않다. 단지 떠 가고 있을 뿐이다.
떠 가는 데는 노력이 요구되지 않는다. 떠 가는 것은 ‘노력 없음(no-effort)’이다.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명상은 물에 떠 있는 것과 같다. 헤엄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헤엄치는 사람과 강물에 떠 가는 나뭇잎을 보라.
떠 가는 나뭇잎의 즐거움은 실로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나뭇잎에게는 어떤 근심도, 어떤 장애도, 어떤 다툼도, 어떤 걱정도 없다.
나뭇잎은 매우 영리하다. 무엇이 나뭇잎의 영리함인가?
나뭇잎의 영리함은 나뭇잎은 강을 자신의 배로 만들었으며 이제 그것을 타고 있다는 것이다.
나뭇잎은 강물이 데려가는 곳이면 어디나 갈 준비가 되어 있고 기꺼이 가려고 한다.
이런 식으로 해서 나뭇잎은 강물의 힘을 무너뜨린 것이다.
나뭇잎은 강물에 대항해 싸우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강은 나뭇잎에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다.
나뭇잎은 어떤 저항도 일으키고 싶어하지 않는다. 단지 떠 갈 뿐이다.
그리하여 나뭇잎은 완전한 조화 속에 있다. 왜 그런가?
이제 나뭇잎은 강과 조화되려 애쓰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뭇잎은 단순히 떠 간다. 그것이 전부이다.
강물이 데려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나 나뭇잎은 간다. 따라서 물에 떠 가는 나뭇잎을 마음속에 간직하라.
그대는 삶의 강물 속에서 이와 같이 떠 갈 수 있는가?
헤엄에 대한 생각조차 없어야 한다. 헤엄의 느낌조차 없어야 한다. 전혀 아무런 마음이 없어야 한다.
살아 있는 사람은 강물에 빠질 수 있지만 죽은 사람은 수면에 떠 있다는 것을 관찰한 일이 있는가?
이것이 어찌 된 일인지 이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살아 있는 사람은 물에 빠지지만 죽은 사람은 결코 빠지지 않는다. 죽은 사람은 곧바로 수면으로 떠오른다.
무엇이 그 차이점인가?
죽은 육체는 노력없음의 상태 속으로 들어간다.
죽은 육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설사 원한다 해도 그럴 수 없다. 육체는 수면으로 떠올라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이 물에 빠질 수 있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은 살아 있으려는 노력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시도 속에 그는 지친다. 그리고 그가 지치게 됨에 따라 그는 물에 빠진다.
그의 싸움이 그를 물에 빠트린다. 강이 빠트리는 것이 아니다.
강은 죽은 사람을 물에 빠트릴 수 없다. 죽은 사람은 어떤 싸움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싸우지 않기 때문에 힘이 빠진다는 문제 따위는 생기지 않는다.
강은 그에게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다. 그리하여 그는 강물 속을 떠 간다.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명상은 물에 떠 가는 것과 같은 것이지 헤엄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대는 단지 떠 있어야 한다.
내가 그대의 몸을 이완하라고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은, 그대는 몸이 물에 뜨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육체에 대한 어떤 통제도 유지하지 않는다.
그때 그대는 육체라는 강변에 자신을 묶어 두지 않는다. 그대는 그것을 놓아 버리고 떠 간다.
내가 호흡을 이완하라고 말할 때에도 호흡의 강변에 매달리지 말라. 호흡에서도 떠나라. 그것과도 함께 떠 가라.
그렇다면 그대는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
만약 그대가 육체를 놓아 버린다면 그대는 안으로 움직일 것이다.
만약 그대가 육체를 붙잡고 있으면 그대는 밖으로 나올 것이다.
사람이 강변을 꽉 붙잡고 있다면 어떻게 강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그는 강변으로 되돌아올 수 있을 뿐이다.
사람이 강변을 떠나면 그는 곧바로 강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이처럼 삶의 흐름, 신성한 의식의 흐름은 우리 안을 흐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강변을, 육체의 강변을 붙잡고 있다.
그것을 놓아라. 호흡 역시 놓아라. 생각 또한 놓아라. 이제 모든 강변들은 뒤에 남겨진다.
그대는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이제 그대는 내면을 흐르는 그 흐름 속을 떠 가기 시작할 것이다.
자신을 그 흐름 속에 떠 가도록 허용하는 사람은 대양에 도달한다.
내면의 흐름은 강과 같다.
그리고 그 안을 떠 가기 시작하는 사람은 대양에 도달한다.
명상은 일종의 물에 뜨는 것이다.
물에 뜨는 방법을 배우는 사람은 신성에 도달한다.
헤엄치지 말라. 헤엄치는 사람은 길을 잃을 것이다.
헤엄치는 사람은 기껏해야 이쪽 편 둑을 떠나 저쪽 편의 둑에 도달한다. 그 밖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헤엄치는 사람이 그 이상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는 한쪽 둑에서 다른 쪽 둑으로 갈 것이다.
이 둑은 그대를 강 밖으로 끌어낸다. 저쪽 편 둑 또한 마찬가지이다.
가난한 사람이라면 한참을 헤엄친 후에 기껏해야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상 무엇이 있겠는가?
한참을 헤엄친 후에, 작은 의자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이 델리의 높은 의자에 앉아 있게 될 것이다.
그 이상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이쪽 강둑은 그대를 강 밖으로 데려간다. 저쪽 강둑도 마찬가지이다.
드와르카의 강둑도 델리의 강둑이나 마찬가지로 강 밖에 있다. 그것은 아무 차이도 없다.
헤엄치는 사람은 오직 둑에 다다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물에 떠 가는 사람은 어떠한가?
어떠한 둑도 물에 떠 가는 그 사람을 막을 수 없다. 그는 스스로를 그 흐름 속에 놓아버렸기 때문이다.
그 흐름은 그를 실어갈 것이다. 그것은 틀림없이 그를 실어다가 대양으로 데려갈 것이다.
진정한 목적은 대양에 도달하는 것이다.
강은 대양이 되고 개인의 의식은 신성이 된다.
하나의 물방울이 광대한 대양 속에서 사라질 때, 삶의 절대적인 의미, 삶의 최고의 지복, 삶의 가장 큰 아름다움이 성취된다.
궁극적으로, 죽음의 기술은 물에 떠 가는 기술이다.
죽을 준비가 된 사람은 결코 헤엄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원하는 곳으로 나를 데려가라. 나는 준비되어 있다!”
이 나흘 동안 내가 이야기 한 것은 모두 이것으로 귀결된다.
-오쇼, <누구도 죽지 않는다>에서, 196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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