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향기

사랑이 실패한 이유

파라리아 2012. 6. 24. 00:36


질문:

저를 진실로 사랑해 주는 사람, 저의 사랑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찾아 저는 평생을 허비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시도는 모두 쓰라린 실패로 끝나고, 이제 저는 철저하게 거부당했다는 절망감을 느낍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OSHO:

첫 걸음부터 잘못되었다. 일단 첫걸음이 잘못되면 길 전체가 어긋나 버린다. 그대는 그대를 진정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을 찾는 것으로 시작했다. 출발점부터 그대는 빗나갔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그대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를 사랑해주는 많은 사람들을 발견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매력적이고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그는 우아함과 기품이 넘친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추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미워할 수 밖에 없다. 다른 선택의 가능성은 없다. 중립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에 중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이것이나 저것 둘 중의 하나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자신을 미워한다. 그리고 이 미움을 통해 자신을 불구자로 만든다. 자신을 중독시킨다. 어떻게 다른 사람이 그대를 사랑해 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대 자신조차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데 누가 그대를 사랑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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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 신비주의자인 힐렐(Hillel)의 유명한 말이 있다. 이 말을 명심하라.


“그대가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대를 위할 것인가?”

 

이 말의 나머지 부분 또한 아름답다.


“만일 그대가 오로지 그대 자신만을 위한다면 그대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것이 두 개의 극(極)이다. 그대는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그대자신에 대한 첫번째 의무이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그 자기애(self-love) 안에 빠져들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삶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그대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된 다음에 다른 사람을 찾아보라. 그러면 틀림없이 발견할 것이다! 이 지구는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사람들로 가득찼다. 다만 그대만이 아름답지 않았다. 그대가 사랑으로 흘러넘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그대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 그대만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이 아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문제로 시달리고 있다. 모든 사람이 사랑받기를 원하지만 아무도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 아무도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

                        

사랑은 훌륭한 기술이다! 사람들은 그림 그리는 법과 음악을 연주하는 법을 배운다. 몇 년동안 배운 다음에야 서서히 아름다운 것을 창조할 수 있게 된다. 사랑은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현상이다. 그런데 그대는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 사람들은 세상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사랑의 능력을 갖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삶은 사랑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는 하나의 기회이다. 모든 인간이 잠재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잠재성이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수영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는 것과 같다. 수영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해서 수영을 아는 것은 아니다. 수영하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


이것은 역설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인간은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 말에 대해 명상하라. 사랑이 거기에 있다. 하지만 이 사랑은 연마되지 않았다. 광산에서 방금 캐낸 다이아몬드와 같다.


세상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는 코히누르(Kohinoor)이다. 그러나 이 다이아몬드를 발견한 사람은 몇 달 동안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이 다이아몬드를 아이들에게 갖고 놀라고 주어버렸다. 그는 이 보석을 그냥 예쁜 돌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이 보석을 갖고 놀았다. 몇 달 동안 이 다이아몬드는 아이들 손에 있었다. 그러다가 다이아몬드에 대해 잘 아는 보석상의 눈에 띄었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렇게 큰 다이아몬드는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였다.

그 다음 오랜 세월을 두고 이 다이아몬드는 연마되고 또 연마되었다. 이제 지금의 코히누르는 본래 무게의 삼 분의 일 밖에 안된다. 그러나 연마되고 다듬어질수록 더 가치있는 보석이 되었다. 이제 무게는 삼 분의 일 밖에 안되지만 값어치는 수 백만배에 달한다.

사랑에도 이같은 일이 일어난다. 사랑은 연마되지 않은 다이아몬드이다. 그대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훌륭한 예술이다. 그것은 가슴으로 연주하는 음악이다.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과 같다. 사랑은 에너지의 춤이다. 이렇게 거대한 에너지의 춤이 일어나고 가슴이 노래로 충만할 때, 영혼이 하나의 심포니(symphony)가 될 때, 이때 비로소 그대를 사랑하는 누군가를 발견할 것이다.


그대는 말한다.


"저를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저는 평생을 허비했습니다."


“진실로 사랑하는”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그대는 사랑에 대해 어떤 관념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것이 그대가 두번째로 빗나간 점이다. 그대는 진실한 사랑에 대해 관념을 갖고 있다. 그대는 완벽주의자이다. 그런데 삶에는 아무 것도 완벽하지 않다. 만물이 아름다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만일 모든 것이 완벽했다면 삶이 너무나 지겨워졌을 것이다.

                

버트란트 럿셀(Bertrand Russell)의 말은 옳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천국이라는 것이 있다면 나는 그 곳에 가고 싶지 않다. 그 곳에는 오직 완벽한 사람들만 있을 것이고, 삶이 너무나 지겨울 것이다.”


완벽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삶을 생각해 보라......모든 인간이 완벽한 세상을 상상해 보라. 이것은 더 이상 성장도 진보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것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천국이라는 곳이 있다면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완전히 질려버릴 것이다. 그런데 다른 곳으로 갈 방도가 없다. 일단 천국에 들어가면 그것으로 끝이다! 탈출구가 없다.


완벽주의는 신경증을 낳는다. 완벽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노이로제 증상이다.


지금 그대는 진실한 사랑에 대해 어떤 개념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대가 말하는 ‘진실한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은 사랑이다! 진실한 사랑도 없고, 진실하지 않은 사랑도 없다. 사랑은 그저 사랑일 뿐이다. 사랑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 진실할 필요도 없고, 진실하지 않을 필요도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특정한 관념을 갖고 있다.


가령,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사랑만이 진실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영원히 시들지 않는 장미꽃을 찾는 것과 같다. 그런 장미꽃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그런 장미꽃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플라스틱 꽃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장미꽃이 아니다.

살아있는 꽃은 아침의 산들 바람에 춤추고, 태양과 귓속말을 주고받는다. 나비와 함께 놀이를 즐긴다. 즐거움으로 넘친다! 그러나 저녁 때가 되면 꽃잎이 지고 시든다...... 내일이면 장미꽃이 있던 흔적조차 없을 것이다.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갔는지 자취도 없을 것이다. 장미꽃은 아무 곳도 아닌 곳에서 왔다가 아무 곳도 아닌 곳으로 사라졌다. 그 장미는 살아있는 꽃이었다.

                

사람들은 사랑에 관해 아주 어리석은 관념을 갖고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사랑이 영원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이 그들을 방해한다. 그들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확실하게 만들고 싶어한다. 이 사랑이 얼마나 머물 것인지 알고 싶어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것을 확신할 수 있겠는가? 아무도 보장해 줄 수 없다. 확실한 보장책은 어디에도 없다. 오늘 있던 사랑이 내일이면 가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일 사랑이 가버릴 때 “그것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하지 말라. 만일 이렇게 말한다면 그대는 크게 오해한 것이다.

                

진실한 것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오직 진실하지 못한 것만이 정체한다. 진실한 것은 계속해서 성장한다. 이 성장에는 끝이 없다. 만일 삶에 영구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변화이다. 변화를 제외한 모든 것이 변한다.


그러므로 사랑이 가버렸을 때 “그것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하지 말라. 그대는 어떤 것이 진실해지기 위해서는 영구적이어야 한다는 기준을 갖고 있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기준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이런 생각이 많은 사람들을 괴롭혀왔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이 불가능했던 것도 이 어리석은 관념 때문이다. 나는 내일이면 사랑이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사랑은 사라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금방 시드는 장미꽃이 있는가 하면 좀더 오래 피어있는 장미꽃이 있다. 그 다음에는 정원사의 손에 달렸다. 정원사가 어떻게 돌보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그대는 묵타(Mukta)처럼 정원을 돌보는 솜씨가 있어야 한다. 묵타는 식물을 돌보는 기술이 있다.

                

그대는 매우 주의깊어야 한다. 심각할 필요는 없다. 유쾌하면서도 주의깊어야 한다. 사랑은 매우 섬세하고 민감한 현상이다. 사랑을 창조하는 것은 어렵지만 파괴하는 것은 매우 쉽다. 사랑은 아주 미묘한 선율이다. 극소수의 기타리스트만이 이런 선율을 연주할 수 있다. 사랑은 참으로 섬세하고 미묘한 선율이다. 소리보다는 침묵에 가까운 선율이다.


거기에 어떤 소리가 들어있다면 침묵을 드러내는 배경으로 작용할 뿐이다. 침묵과 대비를 이루면서 침묵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그대는 무엇이 사랑인지 배운 적이 없다. 그대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대는 누군가 진실로 그대를 사랑하고 받아들일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출발했다. 그러나 정작 그대자신은 그대를 받아들인 적이 있는가? 진정으로 자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만나기란 아주 힘들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자신을 개선하려고 애쓴다. 그들은 자기자신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것이 세상의 설교가들로부터 날마다 그대가 배우는 것이다. 개선하라! 개선하라! 그러나 이 말은 이런 뜻이다.


“결코 그대자신을 받아들이지 말라. 그대자신에 만족하지 말라. 그대자신을 즐기지 말라. 끊임없이 개선하라.”

                

그래서 사람들은 사다리를 타는 사람이 된다. 그들은 오직 한 가지 밖에 모른다. 어떻게 사다리를 오르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다리의 끝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망연자실해 진다. 그들이 아는 기술이란 사다리를 오르는 것 뿐이다. 그런데 이제 사다리가 끝났다. 그들은 사다리를 오르는 것 외에 아무 것도 모른다. 그래서 사다리의 끝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곤경에 처한다.


항상 이런 일이 일어난다. 어떤 사람은 부를 축적하는 법을 배웠다. 그래서 그는 계속 부를 축적해 가고, 마침내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는다. 이제 그는 무엇을 해야할지 모른다. 그가 아는 것은 축적하는 것 뿐이다.


어떤 사람은 권력을 추구하다가 마침내 대통령이 된다. 이때 그는 궁지에 빠지고 매우 어리석어 보인다. 성공한 정치가들의 눈을 들여다 보라. 그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이다. 사다리가 끝났다! 그들은 일국(一國)의 수상 또는 대통령이 되었다. 이제 그들의 사다리에는 더 이상 오를 칸이 없다. 그들이 아는 것이라곤 사다리를 오르는 것 뿐이다. 그런데그대는 무엇이 사랑인지 배운 적이 없다. 그대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대는 누군가 진실로 그대를 사랑하고 받아들일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출발했다. 그러나 정작 그대자신은 그대를 받아들인 적이 있는가? 그들은 사다리 끝까지 올라왔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들은 차를 따라 달리는 개와 같다. 차를 따라잡은 다음에 개들은 멍청해진다. 이제는 무엇을 할지 모른다.


평생동안 그들은 정상에 도달하려는 일념으로 달려왔다. 이제 그들은 도달했다. 돌연 그들은 크게 당황한다. 그들은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다. 마음 전체가 희미하고 멍청해진다. 이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이 사다리의 가장 높은 칸에 머물기 위해 애쓰는 것 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계속 올라오면서 그들의 다리를 잡아당기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의 지위에 매달린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그대는 아름다운 여자 또는 남자를 찾다가 어느 날 그런 사람을 발견한다. 돌연 그대는 어쩔 줄 몰라 당황한다. 그대가 아는 기술이라곤 아름다운 여자를 찾는 것 뿐이다. 그런데 그런 여자를 찾았다. 이제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 것 같다. 


가슴 속에서 사랑의 음악, 사랑의 멜로디를 연주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면,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을 발견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즉시 그 관계가 쓰디쓰게 변한다. 허니문(honeymoon)이 지나가기도 전에 그들의 관계가 끝나버린다.

그대는 말한다.


저를 진실로 사랑해 주는 사람, 저의 사랑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찾아 저는 평생을 허비했습니다. 


먼저, 그대자신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타인에게 완벽함을 요구하지 말라. 인간적이 되라. 비인간적인 완벽함을 요구하지 말라. 그대는 사랑에 관해 아주 로맨틱(romantic)한 관념을 주입받았다. 그것이 화근이다. 그대는 낭만적이고 시적인 관념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꿈꾸는 시인의 관념이 실재의 인간은 아니다. 인간은 실재한다 그런데 그대는 꿈같은 시 속에 살고 있다. 그대는 완벽한 상대방을 찾고 있다. 그러나 그대의 요구에 들어맞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이 어딘가 불충분하다. 


생각해 보라. 그대는 그대의 사랑을 받아들여주는 사람을 원했다. 그러나 그대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아들였는가? 아니다. 그대는 완벽한 연인을 찾고 있었다. 명심하라, 그대가 완벽한 연인을 찾고 있을 때 상대방 또한 완벽한 연인을 찾고 있다. 두 사람 다 똑같은 사회에 의해 세뇌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사람이 스승에게 물었다. 


“저는 평생동안 완벽한 여자를 찾아왔습니다.”


스승이 물었다. “그래서 그런 여자를 찾았는가?”


남자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예, 찾았습니다.” 


“그런데 왜 슬픈 표정을 짓는가? 무슨 일이 있는가?”


“그녀 역시 완벽한 남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대들 모두는 똑같은 사회, 똑같이 낭만적인 관념에 의해 세뇌되었다. 그대는 실재와 아무 관련도 없는 허무맹랑한 시를 먹고 살아왔다. 실제로, 그대가 사랑에 관해 배운 것은 시인들을 통해서이다. 그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소위 시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사랑과 아무 상관도 없다. 그들 자신도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들의 시는 그들이 놓친 사랑의 자리를 메우기 위한 대용품일 뿐이다. 그들의 시는 꿈이다. 그들의 시는 경험에 바탕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시를 먹고 살아왔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시인이 된 사람들은 사랑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시인이 되었다. 그들은 자신이 할 수 없었던 모든 것을 글로 쓴다. 그들의 시는 배고픈 사람의 꿈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단식을 하면 밤중에 푸짐한 음식에 대한 꿈을 꾼다. 그들의 시는 사랑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의 꿈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당연히 그들은 체험의 결핍을 보충하기 위해 계속해서 더 나은 꿈을 만들어낸다.

                

그들의 시는 질병이며 음란물이다. 그들의 시는 그대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환상을 심어준다. 그러나 인간은 환상이 아니라 실재이다. 그대의 환상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환상을 버려라. 그러면 세상이 아름다운 사람들로 넘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타인에게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면, 먼저 그대자신을 받아들여라. 그리고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아들여라. 이 조건을 충족시키면 그대는 타인에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말라. 그대는 부정적인 마음으로 살아왔음에 틀림없다. 그대의 말은 부정적인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좀더 긍정적이 되라.

                

뉴 잉글랜드의 한 마을에 두 명의 유명한 인물이 있었다. 한 명은 좋은 일이라곤 전혀 하지 않는 야비한 인물이었고, 다른 한 명은 남에 대해 나쁜 말은 전혀 하지 않는 낙천주의자였다.


때가 되어 그 야비한 인물이 죽었다. 그의 장례식이 있던 날, 많은 사람들이 우편물을 받으려고 우체국 앞에 모여 있었고, 자연히 이제는 고인이 된 그 인물이 화제에 올랐다. 사람들은 그를 구두쇠, 거짓말쟁이, 도둑놈, 협잡꾼, 뒷구멍에서 험담을 일삼는 자로 묘사했다. 그러나 낙천주의자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사람들 중의 한명이 그에게 말했다.


“이봐, 그 늙은 악당에 대한 우리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자네는 그에게 동정을 살만한 구석이 있었다고 생각하나?”

낙천주의자가 말했다.


“글쎄......그가 하모니카를 불 줄 알았다는 것은 우리 모두 인정해야 할거야.”

                

좀더 긍정적이 되라. 그러면 가장 야비한 인물에게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부정적이 되면, 가장 아름다운 사람에게서도 추한 면을 찾아낼 것이다. 추한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에 살기를 원한다면 부정적이 되라. 그대는 온 세상을 추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주변을 온통 추하게 만드는 것은 그대의 마음이다. 그대는 오직 추한 것, 오직 부정적이고 잘못된 것만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지옥에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지옥의 정체이다. 부정적인 마음이 지옥을 만든다. 반면, 긍정적인 마음은 천국을 만든다.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면 이 세상이 곧 낙원이요, 이 몸이 곧 붓다이다.


모든 것은 그대에게 달렸다. 어떻게 보느냐,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달렸다. 그대의 삶을 창조하는 사람은 바로 그대자신이다. 이 삶은 의미있고 아름답고 기쁨에 넘치는 삶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먼저 그대의 가슴 속에 그런 요소를 창조해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사방에 그것을 퍼뜨려야 한다. 그대는 먼저 그대자신 안에 창조해 낸 것만을 세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 


존재계는 메아리처럼 그대를 반영한다. 




- OSHO, 오쇼코리아 매거진에서 발췌(www.oshokore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