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향기

[펌] “빈 배로 온 인생, 그냥 빈 배로 떠나시구려” (도올, 2008.03.07)

파라리아 2009. 7. 28. 04:49

허주청광 김충렬 선생의 서거를 애도함
조허주청광지서거(弔虛舟淸狂之逝去)

방동미(方東美) 교수가 1974년 5월 퇴임 강연을 앞두고 타이베이 자택으로 김충렬 교수와 필자를 초대했다. 왼쪽부터 김충렬, 방동미, 김용옥.

 

큰 별이 떨어졌다. 벽사(碧史) 이우성(李佑成) 선생님 같은 분이 아직도 사계를 지키고 계시지만 한학(漢學)을 머리로 한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몸으로 체득하신 석학들이 우리사회에서 하나 둘 스러져가는 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에는, 밤하늘의 유성이 꼬리를 흐릴 때 아련히 남는 아쉬움, 아니 그것과는 비견할 수조차 없는 애잔한 감정이 솟구친다. 한 시대의 종언이랄까? 진정한 고전의 상실이랄까? 다시 회복하기 어려운 세대에 대한 그리움이랄까?

『장자』의 ‘산목’편에 ‘빈 배’ 이야기가 있다. 장자가 가파른 양안 사이로 흐르는 장강(長江)을 객선 타고 지나가는데 선장이 아주 살기등등한 흉악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라 겁이 좀 났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비좁은 협곡에서 어떤 배 이물이 객선의 허리를 받은 것이다. 그 배주인은 꼼짝없이 죽었겠구나 하고 갑판에 나가보니 선장이 태연히 물길만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이 사람이 도통을 했나 하고 주변을 바라보니 이 객선을 받은 배는 빈 배(虛舟)였다. 강안(江岸) 절벽에 묶여 있던 빈 배의 새끼줄이 삭아 떨어져 마침 지나가는 객선을 들이받은 것이다. 이때 장자는 무릎을 친다. 깨달은 것이다. 저 배처럼 내 마음이 비었다면, 사람을 들이받아도 그 사람이 화를 낼 일이 없겠구나! 자기를 비우고 세상을 떠 노닌다면 그 누가 나를 해하리오? (人能虛己以遊世, 其孰能害之.)

선생은 원주 문막 사람인데, 할아버지가 문간방에 서당선생을 들여 어려서부터 한학을 가르쳤다. 꼬마 때부터 시(詩)에 능(能)하여 동구 도처에 한시를 써놓고 돌아다니곤 했기에 사람들이 그를 신동이라 불렀지만 시 내용이 과격한지라 좀 불안하게 쳐다본 모양이다. 장성하자마자 일찍이 장가를 들었는데 처가사람들이 그를 항상 “미친놈”이라 불렀다. 별 장래성도 없는 한학만 한다 하고 생계를 돌봄이 없이 괴팍한 짓을 자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놀림을 당하다 못해 선생은 이렇게 외쳤다: “그래! 너희 놈들은 미쳐도 탁하게 미쳤으니 탁광(濁狂)이고, 나는 미쳐도 제대로 맑게 미쳤으니 청광(淸狂)이다. 나는 빈 배처럼 유세하는 청광이로고!” 그래서 자기 호를 허주청광(虛舟淸狂)이라 지었다. 그가 바로 엊그제 영면한 김충렬(金忠烈)이다.

허주청광은 국비장학생으로 대만으로 유학을 가서 한학의 빈 배에 신학문의 날개까지 달고 우주를 주유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중국대륙의 거유(巨儒) 방동미(方東美) 선생의 수제자가 되어 유·불·도를 통달했던 것이다.

내가 대학교 3학년 때, 어떤 젊은 선생이 대만에서 온 동철(東哲)의 신예라 하고 노장철학강의를 맡았다. 나는 불과 학부학생에 지나지 않았지만 새로 부임한 선생을 골탕 먹이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 시절 학생들은 신임선생을 그냥 호락호락 넘기지 않았다. ‘니가 『노자도덕경』을 알면 얼마나 아느뇨?’ 청광이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를 칠판에 쓰자마자 나는 이렇게 질문했다. “가도지도(可道之道)를 플라톤의 이데아와 비교하여 한번 말해보시오.” 그러자 청광은 유려하게 ‘왕필주’를 흑판 위에 내리갈겼다. “가도지도, 가명지명, 지사조형, 비기상야.”(可道之道, 可名之名, 指事造形, 非其常也.) 선문답 같은 대답이었지만 나는 내용보다도 그가 흑판에 휘갈기는 분필의 활달한 서도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리고 첫 강의를 떠나면서 청광은 학생인 나에게 자기 손에 들려 있던 『노자왕필주』를 선물로 주었다. 결국 그 순간이 나의 학문세계를 결정하게 될 줄이야! 지금도 그 책은 나의 책상머리에 꽂혀있다. 청광의 깨알 같은 잔글씨가 두주(頭註)로 남아있는 그 책 한 권 때문에 나는 평생 노장(老莊)을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학생들은 꿈도 꾸지 못할 얘기지만, 우리 때만 해도 정통유학을 공부한 사람이 노장에 통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단이었다. 『도덕경』은 박정희 치세하의 『자본론』보다 더 끔찍한 느낌이 드는 금서였다. 더구나 『팔만대장경』을 몸에 익힌다는 것은 요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 학계에 혜성 같이 등장한 청광은 13경을 암송했고, 노장을 통달했고, 팔만대장경의 주요 경서를 다 읽었고, 정통도장경을 다 훑었다. 유·불·도를 그와 같이 통달한 인물이 우리 학계에는 없었다. 내가 대학시절에 이미 집에 『조선왕조실록』『대정대장경』『정통도장』의 방대한 전질을 사놓고 머리를 싸매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었던 그 스케일감이나 금기의 부재, 이 모든 것은 허주청광에게서 배운 것이다.

나는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허주청광의 선생, 방동미의 마지막 제자가 되기 위해 대만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허주청광은 고려대에서 휴가를 얻어 다시 대만으로 와서 나와 함께 방동미 선생의 마지막 한 학기 강의를 들었다. 대승불교강의였다. 사제(師弟)가 함께 사이 좋게 대만대학 인문관에 앉아있었다. 그 뒤의 슬픈 사연들을 여기 일러 무삼하리오? 빈 배로 온 인생, 그냥 빈 배로 떠나시구려!(虛舟來虛舟去兮.) 노자는 말한다. 누가 흙탕 속에서 자기를 흐리게 만들면서 그 물을 맑게 하리오?(孰能濁以靜之徐淸?) 허주청광 김충렬은 우리 사회를 맑게 만든 학문의 정도(正道)였다.

◇『노자왕필주』=『노자도덕경』은 도가철학의 고경으로 선진(先秦)문헌에 속한다. 그러나 그 문헌을 주해하여 중국 역사에 널리 알린 사람은 삼국시대의 천재 왕필(王弼, 226~249)이다. 왕필은 불과 16세에 『노자』를 주해하였다고 전하는데 그 내용의 심오함과 적확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왕필은 『주역』에 대해서도 중국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주를 냈고, 23세에 요절했다.

◇방동미(方東美· Thome H. Fang, 1899~1977)= 안훼이(安徽)성 통츠엉(桐城)의 서향문제(書香門弟)로서, 금릉대학(金陵大)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대학에서 학위를 획득한 후, 귀국하여 중앙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일제가 침략할 때, 중국청년들의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중국인의 심오한 인생철학을 라디오전파를 통하여 강의한 것으로 유명하다.

2008.03.07
도올 김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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