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으로 볼 때, 가장 중요한 사실 중의 하나는 인간이 깊이 잠들어 있다는 것이다. 육체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인간은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인간은 생각하고 일하고 걷고 상상하고 꿈꾸지만 그 밑바탕에는 삶의 기본적인 토대로써 끊임없이 잠이 이어진다. 그대가 진정으로 깨어나는 순간은 드물다.
그런 경우는 손가락으로 꼽을만큼 아주 드물다. 그대가 칠십년을 산다고 치면 일곱번만 깨어나도 아주 많은 경우에 속한다.
사람들은 로보트처럼 산다. 로보트는 기계적으로는 효율적일지 모르지만 자각(自覺)이 없다. 바로 이것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우리는 수 많은 문제에 부닥치지만 그 문제들은 모두 깊은 잠에서 생기는 부산물이다.
그러므로 제일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이 잠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선(禪)은 잠에서 깨어나 의식의 각성을 이루려는 노력이다. 모든 종교는 더 의식적이 되려는 노력, 삶에 더 많은 의식의 각성을 가져오려는 노력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의 잠이 깊은 동일시(identification)와 집착(attachment)으로 구성된다고 강조한다. 인간의 삶에는 두 층이 있다. 하나는 본질적인 층이며 다른 하나는 부대적(附帶的인 층, 비본질적인 층이다. 본질적인 것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다. 그러나 부대적인 것은 태어나고 살다가 죽는다. 본질적인 것은 영원하다. 그것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러나 부대적인 것은 우발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부대적인 것에 너무 집착하고 본질적인 것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인간은 돈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돈은 부대적인 (accidental)것이다. 돈은 본질적인 삶과 아무 관계도 없다. 인간은 집과 자동차, 부인이나 남편, 아이들, 인간관계에 너무 집착한다. 모든 관계는 부대적인 것이다.그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20세기를 '부대적(附帶的)인 시대(the accidental century)'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맞는 말이다. 사람들은 돈,권력,명예,지위등 부대적인 것에 너무 집착해서 살고있다. 그러나 죽을 때에는 그 모든 것을 남겨두고 가야 한다.알렉산더같은 사람조차 빈손으로 죽었다!
위대한 신비주의자가 죽었다. 천국에 도착했을 때, 그는 신에게 물었다.
"20세기에는 왜 예수님같은 인물이 태어나지 않습니까?"
신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어림도 없는 일이지! 20세기에 세 명의 현자(賢者)와 한 명의 숫처녀를 어디에서 구한단 말이냐?"
이십세기는 부대적인 것이 가장 횡행하는 시대이다. 인간은 <나의 것>, <나의 소유물>에 너무 집착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망각했다. 사람들은 <나(I)>를 잊었으며 <나의 것(my)>이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나의 것>이 더 중요하게 될 때, 사람들은 부대적인 것에 더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나(I)>가 더 중요한 위치에 남아있을 때에 <나의 것(my)>은 충실한 하인일 뿐이다. 그때에는 그대가 주인이다. 그대는 노예가 아니다. 주인이 될 때, 그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삶을 살게 된다.
이렇듯 순수한 <나>가 존재하는 본처(本處)를 선(禪)에서는 '본래면목'이라고 부른다. 이 <나>는 에고와 아무 관계도 없다. 에고는 모든 비본질적인 소유물의 중심일 뿐이다. 에고는 <나의 것>이 축적된 것이다. 내 집, 내 차, 나의 신분, 나의 종교, 나의 경전, 나의 도덕성, 나의 성격, 나의 가족, 나의 유산, 나의 전통,- 이 모든 <나의 것>들은 계속해서 축적되고 에고로써 굳어진다. 선(禪)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너의 진면목을 발견하라.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그 본래 얼굴을 발견하라.네가 죽어서도 다시 가지게 될 그 얼굴을 발견하라."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그대가 자신의 얼굴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든 간에 그 얼굴은 부대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다. 그대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본다. 그대는 내면으로부터 자신의 얼굴을 느끼지 못한다. 그대는 밖에서 자신의 얼굴을 본다. 그대는 자신의 진면목을 아는가? 그대는 단지 거울이 비춰주는 얼굴을 알 뿐이다.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그 거울이다.
남편은 부인에게 "여보,당신은 정말 아름답소!" 라고 말한다. 그러면 부인은 자신이 정말 예쁘다고 생각한다. 당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당신은 정말 지혜롭고 지적인 분이십니다. 당신은 보기 드물게 훌륭하신 분입니다" 하고 말하면 그대는 그 말을 믿기 시작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대를 비난하고 미워하며 화를 낸다. 그때 그대는 그들의 말을 인정하지 않지만 무의식 깊은 곳에는 그들의 말이 축적된다.
어떤 사람은 그대를 아름답다고 말하고,또 어떤 사람은 못 생겼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그대를 현명하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바보같다고 말한다.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인가? 그대는 거울에 의존해서만 자신을 얼굴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양쪽 모두가 거울이다. 그대는 자신을 바보라고 말하는 거울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 거울은 그렇게 말했고, 나름대로 거울의 임무를 다했다. 그대는 그 말을 애써 무시하고 의식하지 않으려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의 거울이 그대를 보고 바보라고 말했다는 사실은 지워지지않고 그대의 무의식 속에 남을 것이다.
그대는 거울을 믿는다. 그때 그대는 분열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대에게는 수 많은 거울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거울들은 저마다 다른 말을 한다. 어떤 사람은 그대를 현명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대가 현명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의견이 그렇다는 말이다. 또 어떤 사람은 그대를 어리석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대가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눈에 그렇게 보인다는 말이다. 그들은 다만 자신의 싫고 좋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그대에 관해 아무 것도 말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지 그대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누구인지 보여줄 수 있는 거울은 없다. 거울들은 단지 그대의 표면, 그대의 피부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대의 피부가 그대는 아니다. 그대 자신은 매우 깊은 곳에 있다. 그대는 육체가 아니다. 젊은 육체도 언젠가는 늙어버릴 것이다. 건강하고 아름답던 육체도 어느 날 갑자기 불구가 되거나 마비상태에 빠질지도 모를 일이다. 활기에 넘치던 그대도 언젠가는 생명력이 쇠퇴하여 바람빠진 고무풍선처럼 되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표피에 있지 않다! 진정한 존재는 그대의 중심에 있다. 부대적인 것에 몰두하는 사람은 표피 위에 산다. 그러나 본질적인 인간은 중심에 머문다.
유태인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겠다. 이 이야기는 대단히 깊은 뜻을 담고 있다.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항상 잠에 취해 있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잠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군중들이 많이 모이는 모임에서도, 연주회장에서도, 중요한 회의석상에서도 그는 앉은 채 잠자곤 했다.
그대는 이 사람을 잘 알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 사람은 곧 그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그대는 이 사람과 수 없이 많이 마주쳤을 것이다. 어떻게 그를 피할 수 있겠는가? 그는 바로 그대이다!
그는 온갖 이상한 포즈로 잠을 잤다. 그는 팔을 머리 뒤로 돌려 깍지를 끼고 선 채로 자기도 했다. 그는 극장에서도, 거리에서도, 교회에서도 잠을 잤다. 어디를 가든지 그의 눈은 잠에 취해 있었다. 만일 그가 힌두교인이었다면 물구나무를 서서 잤을 것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잠을 자는 힌두교인들을 본 적이 있다. 많은 요기(yogi)들이 물구나무 서서 자는 재주를 갖고 있다. 그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긴 하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다만 많은 훈련이 요구될 뿐이다.
이웃들의 말에 따르면, 그는 큰 불이 났을 때에도 잠에 골아떨어져 있던 적이 일곱번이나 되었다. 한번은 그를 구출하여 길가에 내려 놓았는데도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결혼식에서도 잠에 취해 있었다. 결혼서약이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은 신랑인 그를 깨우기 위해 촛대로 여러번 내리쳐야 했다. 그는 간신히 서약을 끝낸 다음 곧바로 잠에 골아떨어졌다.
그대의 결혼식과 신혼여행을 생각해 보라.그대는 진정으로 깨어있었는가? 그대는 항상 잠에 취해 있었다!
한번은 그가 침대에 누어 곤하게 자고 있었다. 잠결에 그는 거리에서 천둥소리가 들리고 침대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밖에 비가 내리나보다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 달콤한 잠에 빠져 들었다. 그는 따뜻한 이불 속으로 파고 들었다.
그대는 어떤 일을 잠결에 해석한 적이 얼마나 많은가? 그대는 알람시계를 맞춰놓고 잠을 자지만, 알람이 울릴 때면 종이 울리는 교회 안에 있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마음은 속임수를 부린다. 그래서 알람소리로 인해 잠이 방해받는 것을 교묘히 피해간다.
잠을 깼을 때, 그는 이상한 허공을 보았다. 부인도 없고 침대도 없었다. 이불도 없었다. 그는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려 했지만 내다볼 창문이 없었다. 그는 삼층 침실로부터 뛰어내려가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뛰어내려갈 계단이 없었다. 더구나 고함칠 공기도 없었다.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했지만 문도 사라지고 없었다.모든 것이 어디론가 증발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한 가운데 그는 잠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나 곧 그는 잠이나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잠잘 지구(地球)가 없었다. 그는 절망해서 세상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나는 세상이 사라질 때까지 잠을 잔 것이다. 세상이 없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하지? 어디로 일하러 가야하지? 어떻게 생계를 꾸려나가야할까? 특히 요즈음은 물가가 비싼 시대가 아닌가? 달걀 한 꾸러미에 일 달러 이십 센트나 한다. 그리고 친구에게 오달러 받을 게 있는데 아내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녀 또한 세상과 함께 사라진 것일까? 내 호주머니에 있던 삼십달러는?"
갑자기 세상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되면 그대 또한 이런 식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대는 그 밖에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모른다.
그대는 달걀값, 직장, 부인, 돈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그대는 그 밖에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모른다. 세상이 사라졌다! 그런데 그대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기계적으로 생각한다. 그는 생각했다.
"만일 잠자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하지? 세상이 사라졌는데 어디에 몸을 눕혀야하지? 그리고 가게에 물건쌓는 일은 누가 끝내지? 우유가 마시고 싶다면 어디에서 우유를 사지?"
그대도 이렇게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잠들 때에는 머리 밑에 세상이 있었는데 깨어보니 세상이 없다!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죽었을 때에는 모든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 갑자기 세상이 사라진다. 돌연 그대는 이 세상에 속해있지 않다. 갑자기 그대는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
이것은 죽은 사람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무엇을 알든간에 그것은 표면에 대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죽었을 때에 돌연 그대의 표면이 사라진다. 그대는 중심에 던져진다. 그런데 그대는 중심의 언어를 모른다. 그대는 중심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 그 중심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허공처럼 보일 것이다.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 망설이며 한 동안 서 있었다. 그러다가 이렇게 생각했다.
"에라, 집어치우자! 세상이 사라진들 무슨 상관이랴? 극장에 가서 영화나 보며 시간을 때우는 게 좋겠다."
그러나 그는 세상과 함께 극장 또한 사라진 것을 알고는 놀랐다. 그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이것 참 큰 일을 저질렀군! 잠에 취해서 큰 일을 저질렀어. 만일 그렇게 깊이 잠들지 않았다면 다른 것들과 더불어 사라질 수도 있었을텐데! 그나저나 어디가서 우유를 구하지? 아침에는 우유를 한잔 마시는 맛이 그만인데! 그리고 마누라는 어찌 된 것일까? 누구와 함께 사라진 것일까? 만일 어떤 놈패이랑 눈이 맞아서 도망쳤다면 내 그 여편네를 가만두지 않겠어!"
이렇게 중얼거리며 그는 시계를 보고자 했다. 그런데 시계를 찾을 수 없었다. 양쪽 주머니를 뒤져 보아도 무한한 허공만이 있을 뿐,아무것도 만져지는 것이 없었다. 그는 생각했다.
산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세상이 사라진 것은 그렇다치자. 나는 세상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어차피 내 세상도 아닌데 뭘. 하지만 내 시계! 왜 내 시계가 사라져야 하지? 흠집 하나없는 새 시계인데! 그나저나 어디가야 우유를 구할 수 있을까? 아침에는 우유 한잔 마시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없는데.
나는 이렇게 엄청난 비극 속에서도 잠을 자고 있었어. 그러니 이렇게 최악의 경우를 당해도 싸지. 도와주세요. 도-와- 주-세-요!
내 뇌는 어디에 있지? 그전에는 뇌가 어디에 있었을까? 왜 나는 세상과 마누라를 잘 감시하지 못했을까? 왜 그들이 사라지도록 수수방관했을까?" 그는 후회하며 허공에 대고 머리를 찧었다.그러나 허공은 매우 부드러웠다. 아무리 머리를 찧어도 그의 이마는 상처 하나 없었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대는 주변에 환상의 세계를 창조한다. 그대는 죽을 때 가지고 가지도 못할 물건들에 집착한다. 그대는 언젠가 수중에서 사라질 물건들에 계속 집착한다.
그래서 힌두교인들은 이 세상을 '환상'이라고 부른다.'세상'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그들은 세상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말은, 그대가 잠으로부터 세상을 창조했다는 뜻이다. 그 세상은 마야(maya), 즉 환상이다. 그것은 꿈의 세계이다.
누가 그대의 부인인가? 그런 생각자체가 어리석은 것이다. 누가 그대의 남편인가? 누가 그대의 아이인가? 그대조차도 그대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그대의 소유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대조차도 그대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관찰한 적이 있는가? 그대는 그대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존재계에 속한다.
그대 자신의 내면으로 더 깊이 들어가 보라. 그러면 자아(self)가 사라지는 지점에 도달할 것이다. 그 곳엔 무아(no-self)의 상태가 있을 뿐이다. 그 상태를 초자아(the Supreme Self)라고 부를 수도 있다. 어떻게 부르든 그것은 단지 용어의 차이일 뿐이다. 그대는 내면 깊숙한 곳에서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어떤 것들이 떠오르는 것을 느낀 적이 있는가? 그대의 욕망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그대의 생각 또한 그대에게 속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그대의 의식(consciousness)조차도 그대가 창조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그대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창조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그대가 그것을 창조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갑자기 세상에 태어났다. 마술처럼! 그리고 그대는 항상 시작과 끝의 중간지점에 있다. 그대는 시작에 대해 알지 못한다. 시작은 그대의 권한 밖에 있다.끝 또한 마찬가지이다. 단지 중간지점에서만 그대는 창조할 수 있다. 그 지점에서만 그대는 계속해서 꿈을 창조할 수 있다.이것이 인간이 부대적인(accidental) 존재가 된 방식이다.
주의하라! 더욱 더 본질적인 존재가 되라. 부대적인 것에 집착하지 말라. 오로지 영원한 것만이 진리이다. 항상 이것을 명심하라.순간적인 것은 진리가 아니다. 순간적인 것을 주의하라.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말라.
한 아일랜드 노인이 호텔을 나왔다. 버스를 타러 가다가, 그는 방 안에 우산을 놔두고 온 것을 깨달았다. 그가 방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신혼부부가 투숙하고 있었다. 행여 그들의 허니문을 방해할까봐 노인은 방문 앞에 무릎을 꿇고 열쇠구멍에 귀를 대고는 방 안의 동태를 살폈다.
"이 사랑스런 눈은 누구우 꺼?"
노인의 귀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기이 꺼!"
여자가 대답했다.
"그러면 이 오똑한 코는 누구우 꺼?"
"자기이 꺼!"
여자가 대답했다. 남자가 계속해서 물었다.
"이 앵두같은 입술은 누구우 꺼?"
"자기이 꺼!"
여자가 흥분에 들뜬 교태로운 목소리로 응답했다.
"그러면......"
남자가 또 물으려고 할 때,노인은 더 이상 문 밖에 서 있을 수 없었다. 노인은 열쇠구멍에 입을 대고 소리쳤다.
"그 침대 옆에 있는 노란색 우산은 내 꺼요!"
<내 것>이라는 이 게임은 가장 어리석은 게임이다. 하지만 세상은 이런 게임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지구는 그대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그대가 죽은 뒤에도 지구는 이 자리에 남을 것이다. 그대가 갖고 있는 다이아몬드는 그대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그리고 그대가 죽은 뒤에도 있을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그대를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그대에게 소유되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
이 소유라는 게임은 가장 바보같은 게임이다.하지만 사람들의 삶은 이런 게임이 전부이다. 구제프(Gurdjieff)는 이렇게 말했다.
"사물과 자신을 결부시키고 동일시하는 것을 포기하면, 멀지 않아 그대의 본질적인 존재와 마주칠 것이다."
그것이 포기(renunciation)의 기본적인 의미이다. 포기, 또는 산야스(sannyas)는 세상을 단념하고 히말라야나 수도원으로 도망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수도원에 들어간다해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똑같은 마음을 갖고 있다. 여기 이 세상에서는 집이 그대의 것이었고 부인이 그대의 것이었다. 이제는 수도원이 그대의 것이 될 것이다. 종교가 그대의 것이 될 것이다. '그대의 것'이라는 사실에는 아무 차이도 없을 것이다. <나의 것>이라는 소유의식은 계속될 것이다. 소유욕은 외부적인 장소와 아무 관계도 없다. 소유의식은 내면의 환상, 내면의 꿈이며 잠이다.
그대가 어디에 있건 아무 것도 단념할 필요가 없는 것, 이것이 진정한 포기(renunciation)의 의미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포기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포기했다는 말은 그대가 어떤 것을 소유했었는데 이제는 단념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소유한 적도 없는 것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진정한 포기는 그대가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 그대는 사물을 이용할 수 있지만 소유할 수는 없다.그대는 이 지구상에 영원히 살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소유할 수 있겠는가?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다. 어떤 것을 이용하고 그것에 대해 감사할 수는 있다. 자신을 이용하도록 허락해 준 사물에 대해 그대는 감사해야 한다. 그 사물은 유용한 수단이다. 하지만 그것을 소유할 수는 없다.
내가 주인이라는 생각을 버리는 것, 이것이 진정한 포기이다. 진정한 포기는 소유한 물건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소유의식 자체를 버리는 것이다. 이것을 구제프는 '동일시(同一視)에서의 탈피(getting unidentified)'라고 불렀다. 이것이 바울(Baul)들이 '아드하르 마누쉬(Ardhar Manush)', 즉 본질적 인간의 체현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것이 선(禪)에서 '본래면목'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 Osh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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