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의향기

위빠사나 수행에서 명칭은 필요한 것인가? (묘원)

파라리아 2009. 5. 20. 01:37

< 질문 >

'바로 이 생애에서'라는 책과 저번 경행에 대한 글에서 알아차림에 언어적 명칭을 붙이도록 설명하고 있는데, 경행을 하다보니 언어자체가 너무 걸리적 거립니다. 솔직히 저의 소견으로는 언어적 명칭을 염할 때마다 집중이 깨어지는데, 이 언어적 명칭을 붙이는 것은 누구에 의해 설해진 것입니까?

그분은 중생들이 이것을 사용할때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를 관하여 보고 지혜로써 검증한 다음 이것을 설하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만약 단순한 자기체험에 불과한 것이고, 지혜에 의해 검증받지 않은 것이라면 솔직히 그분에게 더 많은 지혜수양을 한 다음 설법을 할 것을 요구하고 싶습니다.

저의 체험에 의하면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은 남에게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알지 못하면서 가르치려 한다면 오히려 왜곡됨을 면치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대각자이자 아라한이신 석가여래와 제자아라한분들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그분들의 설법과 말씀을 변형없이 듣고 싶습니다. 만약 그것이 최근의 승가나 수행자에 의해 변형된 것이라면 변형된 것이라고 분명히 밝혀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상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럼 사두! 사두! 사두!


< 답변 >

"바로 이생애에서"의 저자는 미얀마의 우빤디따 사야도 이십니다. 우빤디따 사야도는 마하시 사야도의 제자이십니다. 큰스님은 미얀마에서 현존하는 스승 중에서 교학과 수행이 모두 매우 뛰어나신 분이십니다.

마하시 수행방법은 명칭을 붙입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방법입니다. 경전에 보면 잊어버리기를 잘하는 수행자에게 명칭을 붙여서 외우도록 지도하신 구절이 나옵니다. 그래서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서 명칭을 붙일 수도 있습니다. 처음 수행하는 수행자가 명칭을 붙여서 얻는 이익이 있습니다. 그러나 명칭을 붙이지 않아도 될 때는 붙이는 것이 장애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쉐우민 사야도께서도 마하시 사야도의 제자이신데 마하시에서 나오셔서 혼자 숲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셨습니다. 쉐우민 사야도의 수행방법은 명칭을 붙이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것은 모두 마하시와 같습니다.

저는 마하시와 쉐우민에서 수행을 했었기 때문에 명칭의 장단점을 비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숲 속에 있을 때와 숲 밖에 나와서 숲을 볼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명칭의 양면성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마하시 수행방법은 배의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과 명칭을 붙이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이 방법은 철저히 경전에 근거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배의 호흡에 관해서는 스리랑카에서 부처님의 정법이 아니라고 비판한 적이 있었으나 "호흡에 의한 풍대의 작용"으로 경전에 근거한 수행입니다.

사실 이 논란에 당사자이신 마하시 사야도는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제자가 경전에 근거하여 모든 사실을 밝혔습니다. 침묵하고 계셨던 것은 이미 이러한 수행방법은 스승에 의하고, 철저하게 경전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하시 사야도는 수행과 함께 교학에서도 뛰어난 대가이십니다.

그러므로 수행자께서 염려하시는 것처럼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근거가 없는 방법을 수행하고 있으면 상좌불교의 전통에서 결코 부지를 할 수 없습니다. 마하시에서는 집중이 안 될 때는 지속적으로 명칭을 붙이게 해서 일단 대상을 붙잡게 하여 집중력을 키우게 합니다.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사마타 수행방법을 활용한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이지만 집중을 위해서 부분적으로 사마타 방법인 빤냐띠(관념. 명칭)를 도입한 것입니다.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수행방법은 매우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경전의 틀 안에서도 서로 다른 다양한 수행법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사마타 수행의 경우는 40가지가 되며 이 방법들이 때로는 위빠사나에서 응용되고 있기도 합니다. 순수 위빠사나라고 해도 사마타의 방법을 완전하게 배제하고 수행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응용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붓다고사의 주석서인 청정도론에 있는 다양한 수행방법을 보면 머리가 아플 정도로 매우 다양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 하나 하나가 모두 철저한 기록에 근거를 하고 있습니다.

수행자들의 근기는 모두 다릅니다. 팔만사천법문이 있는 이유는 사람들의 근기가 다르기 때문에 방편으로 알아듣게 설하셔서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방법도 팔만사천가지가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팔만사천은 많다는 뜻의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그래서 명칭에 관한 것이나 또는 다른 수행방법에 관해서 배척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예사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고 틀렸다고 한다면 크게 구업을 짓는 일입니다. 모두 부처님께서 제시한 많은 방법들 중의 하나이고 또한 큰 스승들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실천해오고 있는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사용하는 알아차림은 무엇이나 받아들여서 수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장애나 불선업도 실재하는 법이므로 알아차릴 대상으로 삼는데 유독 수행방법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수행을 하는 수행자가 수행방법에 대해서는 폐쇄적인 자세를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빤냐띠라고 하는 관념입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이런 관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하는데 평소의 우리가 모두 관념을 가지고 생활하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수행이란 것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수행은 자기의 수행방법이 최고이고, 또한 내가 최고라고 여기기 쉽습니다. 이는 정신세계가 비교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수행방법이 자신에게 맞지 않으면 그뿐입니다. 맞지 않으면 선택하지 않으면 되고 또 맞지 않는다고 무조건 배격하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싫다고 버리는 경우는 화를 내는 것이 아닌지도 살펴봐야 합니다. 좋다고 좋은 것만 선택하면 탐심이 아닌지도 살펴봐야 합니다. 수행을 하려면 싫어도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수행은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수행은 좋다, 싫다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수행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와 맞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수행방법에 대해 배격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마치 대승이 생기면서 상좌불교를 소승이라고 폄하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수행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무심코 말할 수도 있지만 수행방법에 관해서는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자세가 좋습니다.

수행자께서 스승에 근거하고 경전에 근거한 것인가를 질문하신 것은 삿된 방법을 배제하고 정통적인 방법을 사용하고자 하는 정의감과 충정으로 하신 것 같습니다. 사실 이런 자세는 매우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맞지 않는 수행방법은 선택하지 않으면 되는 것으로 그치고 말아야 합니다.


다음 글은 도서출판 행복한 숲에서 발행한 "보니 거기 세상이 있다"에서 제가 명칭에 대하여 쓴 글이 있는데 참고가 될까 해서 올립니다.


< 명칭에 대하여 >

여기 소개된 위빠사나 수행방법은 여러 가지 수행방법 중의 하나인 마하시 명상센터의 전통적인 수행방법이다. 마하시 수행방법은 처음에 사마타 수행을 하고 나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방법이 아니고 처음부터 바로 위빠사나로 시작하는 수행방법이다. 그래서 이런 수행을 주석서에서는 순수 위빠사나라고 한다.

마하시 방법은 대상을 알아차릴 때 명칭을 붙여서 알아차리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여기에 밝혀진 위빠사나 수행내용이 모두 명칭을 붙여서 수행을 하는 것 위주로 말해졌다.

수행 중에 알아차릴 대상을 명칭화 하기 때문에 호흡에 의해 일어나는 배의 풍대의 작용도 '일어남, 꺼짐'이란 단어를 고수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많은 경우에도 '봄' '들음' 냄새' '맛' '움직임' '오른발' '왼발' 등등 모든 용어가 명칭을 붙이는 것을 전제로 말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마하시 수행기록은 이런 점에서 다른 기록과는 표현이 다르다.

또한 예를 들어 '봄, 봄'이라거나 '들음, 들음'을 하라고 하는 경우도 명칭을 붙일 때 이렇게 반복해서 대상을 알아차리라는 의미로 제시된 것이다. 사실 명칭을 붙이다 보면 몇 번이나 해야 하는지 또 얼마나 계속해서 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판단하기가 어려울 때도 있다.
그래서 대상에 따라서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 있고 한두 번으로 그쳐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배의 호흡이나, 경행을 하며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릴 때, 또는 계속해서 지속되는 현상이 있을 때는 연속적으로 명칭을 붙여야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1-2회 내지 3-4회로 그쳐야 한다. 여기 제시된 수행방법은 명칭을 붙이는 것을 전제로 이런 용어를 두드러지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 수행하는 방법을 알고자 한다면 여기 있는 같은 내용에 명칭을 붙이는 것만 빼버리면 된다. 명칭 없이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그냥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된다. 명칭을 붙일 때와 붙이지 않을 때의 수행방법이 하등에 다를 것이 없다.

마하시에서는 배의 호흡을 알아차리기 때문에 '일어남, 꺼짐'이지만, 다른 센터에서 수행을 하는 방법으로 코의 호흡을 알아차려야 할 경우에는 "들숨, 날숨'이 적합하다. 그리고 배의 호흡도 "밀고, 당김"이라거나 또는 "팽창, 수축"이나 '부품, 꺼짐'이라고 다양하게 말할 수 있다.

배의 움직임도 호흡에 의해 일어나고 꺼지는 것이기 때문에 어차피 호흡의 범주에서 벗어 날 수가 없는 풍대이다. 또한 앞선 경우처럼 다양한 용어가 사용될 수 있다. 그래서 배의 움직임이 호흡에 의한 풍대의 작용이므로 배의 호흡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일어남, 꺼짐이란 용어의 사용은 앞서 밝힌 것처럼 오직 명칭을 전제로 한 표현이기 때문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기록에 일어남, 꺼짐이라고 했다고 해서 꼭 그렇게 명명해야 할 이유는 없다. 모두 필요한 대로 사용하면 된다. 그러나 명칭을 붙이지 않는 경우는 그냥 배의 움직임이라고 하거나, 또는 배의 호흡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더 정확히는 배의 일어남, 꺼짐을 '호흡에 의한 풍대의 작용'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이런 말은 경제적이지 못하다. 언어는 노력경제의 원칙이 있어서 자꾸 쉽고 간결하게 변해가고 있다. 이것은 대중의 요구이고 이런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래서 명칭의 용어 선택은 큰 의미가 없으므로 알맞게 사용하면 된다. 마하시 사야도께서도 명칭이 큰 의미가 없다는 이런 뜻을 이미 밝히셨다. '이름이나 명칭이 일어날 때, 실재는 그 이면에 놓인다. 실재가 그 자체를 드러낼 때, 이름 또는 명칭은 사라진다.' 이것은 빤냐띠(모양, 명칭, 관념)와 빠라마타(실재, 성품)를 말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장미를 진달래라고 해도 장미향기는 그대로 난다는 것이다. 수행자가 필요한 것은 이름을 아는 것이 아니고 성품을 아는 것이다. 명칭은 수행초기에 대상을 명확히 하여 자세히 알아차리기 위한 편의상의 방법일 뿐이다. 여기서 장미는 이름이고 향기는 성품이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나 명칭의 의미와 한계를 알아 명칭에 걸려 넘어지면 안 된다.

그러나 배의 움직임을 알아차릴 때 보통 '일어남, 사라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수행을 하다보니 면담 때나 다른 경우에도 용어상의 혼란이 온다. 원래 '일어남, 사라짐'은 배의 움직임을 말하는 표현으로 쓰기도 하지만 무상(無常)이나 생멸(生滅)을 말할 때도 흔히 사용하는 말이다.

그래서 이런 혼란을 피하기 위해 배의 움직임은 "일어남, 사라짐'이 아니고 '일어남, 꺼짐'이나 또는 다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사야도와 대화할 때 수행자는 호흡의 '일어남, 사라짐' 말하고 있는데 사야도께서는 무상의 '일어남, 사라짐'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수가 흔히 있었다. 그래서 면담 중에 지금 호흡과 생멸 중에 어느 일어남, 사라짐을 말하는가하고 지적을 받곤 했다.

배의 호흡을 말할 때 일어남, 사라짐이란 용어가 틀렸다기보다 혼란이 오기 때문에 사용을 하고 있지 않다. 또한 더 정확한 표현은 사라짐보다는 실재적이고 적절한 표현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라짐의 의미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여기서는 사라짐이라고 하기보다는 꺼짐이란 용어를 선택하여 사용하고 있다.

명칭 자체가 빤냐띠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다른 이익이 있어서 일단 명칭화 하기 때문에 이런 용어를 선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명칭을 붙여서 수행을 할 때는 자칫 관념을 알거나 모양을 아는 것에 그칠 수도 있다. 수행을 할 때 실제로 알아야 할 것은 명칭 안에 있는 성품인 빠라마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수행자에게 알아차림을 분명하게 하고 집중력을 갖게 하기 위해서 명칭을 사용하는데 그렇지만 명칭을 붙이면서도 대상의 느낌을 분명하게 알아야하고 대상의 성품을 자세하게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몸을 알아차릴 때도 명칭 속에 있는 지수화풍의 4대 요소를 알아차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수행 중에 나타나는 장애를 명칭을 통해 극복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말고 대상의 성품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한다. 대상의 성품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대상의 변화를 알 수가 없다. 위빠싸나 수행은 변화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삼법인의 지혜가 난다.

차츰 수행이 발전되거나, 아니면 명칭 없이 수행을 하고자 할 때는 여기에 기록된 내용 그대로 수행을 하되 명칭에 쓰이는 단어들을 마음속으로 알아차릴 때 이제는 그것들의 느낌을 아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다만 명칭 대신 느낌을 알면 된다.

하나의 대상에 모양과 성품이 붙어 있다. 그래서 빤냐띠(모양)와 빠라마타(성품)가 붙어 있는 것이다. 수행자가 같은 것을 두고 무엇을 알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빤냐띠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모양 없는 대상이 없기 때문에 빤냐띠라는 모양도 중요하다. 다만 모양을 알아차릴 때와 성품을 알아차릴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필요에 따라서 활용해야 한다.

처음부터 성품을 알아차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실제 수행을 할 때는 그렇지 못하다. 수행자가 무엇이나 능력에 알맞은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필요하면 모양을 알아차리는 것도 중요하다. 그렇지만 결국은 모양 안에 있는 성품을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이다. 그래야 법을 바로 알게 된다.

대상을 알아차릴 때 집중을 위해 빤냐띠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지혜의 눈이 열리면 자연스럽게 빠라마타로 대상을 알아차리게 된다.

위빠사나 수행은 일차적으로 알아차릴 대상이 없으면 안 된다. 알아차릴 대상이 없는 것은 잠을 자거나 망상에 빠지거나 알아차림을 놓친 상태이다. 그런데 대상을 알아차릴 때 반드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대상은 변화가 있거나, 움직임이 있거나, 대상 그 자체의 모습이 있거나, 하여튼 아는 모든 것이 알아차릴 대상이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는 있어야 될 바로 이 대상이 하나 있고, 이 대상을 알아차리는 알아차림이 또 하나 있다. 그리고 여기에 손님으로 나타난 것이 명칭이다. 두 가지 것이 합쳐져서 알아차리던 것이 이제 명칭이 붙어 세 가지 모임이 된 것이다.

그래서 대상과, 알아차림과, 명칭이란 세 가지 것을 하나로 모아서 알아차려야 한다. 조금이라도 알아차림이 소홀하면 실제를 알지 못하고 관념을 알아차리는 결과가 생긴다. 그래서 대상에 정확히 조준하여 알아차리고 특히 대상이 움직일 때는 움직임에 따라 명칭도 정확하게 붙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명칭을 알아차리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명칭을 붙이는 수행을 할 때는 반드시 대상, 명칭, 알아차림 이렇게 세 가지가 삼위일체가 되어야 비로소 완전한 알아차림을 할 수 있고 좋은 집중상태에 이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배가 일어났을 때 명칭을 붙여 꺼짐을 하거나, 꺼졌을 때 일어남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오른발이 움직일 때 왼발을 할 수도 있다. 또 다른 경우에도 움직임은 이미 끝났는데 그때서야 명칭을 붙일 수가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이런 때는 알아차림이 부족한 때이다.

또한 명칭을 붙일 때 대상에 대한 마땅한 명칭이 생각나지 않아서 순간적으로 곤혹스러움을 겪을 수 있다. 미묘한 느낌이거나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일 경우에도 곤란을 겪는다. 그래서 잠시 명칭을 생각하느라고 알아차림을 놓치는 수가 있다. 이때는 명칭을 붙이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때도 습관적으로 붙여야 된다면 명칭중독인지도 알아야 된다. 명칭 없이 대상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그것도 더 큰 문제이다.

명칭을 붙이다 보면 항상 자동적으로 붙게 된다. 그러나 자동은 없다. 모두 마음이 시켜서 하는 것이다. 자기가 좋아해서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꼭 붙여야 한다면 이럴 때는 그냥 대상을 아는 앎을 붙이면 된다. '앎, 앎'하면 무엇이라고 표현은 못하지만 그냥 알고 있는 그 상태를 아는 앎을 하는 것이므로 어느 때나 합당한 명칭이 된다. 그래서 미묘한 것을 표현해야 할 때는 '앎'이란 표현이 적합하다. 미묘하기 때문에 그냥 그것을 아는 마음이란 뜻으로 앎을 사용하면 된다.

그리고 특별히 명칭을 붙이기 곤란하면 다소는 포괄적이거나 개괄적인 어떤 명칭도 좋을 것이다. 명칭의 내용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대상과 너무 동떨어진 명칭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예를 들면 아주 건설적이고 훌륭한 계획을 세우다가 '망상, 망상'을 할 경우에는 괴리가 생긴다. 훌륭한 계획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되므로 그런 때는 '계획함, 계획함'이라고 붙이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어쨌거나 명칭은 대상에 집중하기 위한 좋은 방편이므로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적당한 시기에는 명칭 없이 알아차리는 수행도 해봐야 한다.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우선은 처음에 가르치는 지도자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현명하다. 서로가 교감을 해야 수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츰 수행이 발전된 뒤에는 사용유무를 스스로 선택하면 된다.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좋은 장점도 있고 때로는 장애의 요인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장단점이 무엇인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좋은 점만을 선택하면 수행의 발전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명칭을 장점은 우선 개념화가 되어 대상을 분명하게 인식하여 받아들이기가 좋다.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명칭의 세상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대상의 실체를 인식하여 분명하게 받아들이게 한다. 대상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므로 확실하고 뚜렷하게 대상을 알아차리게 한다. 또한 마음이 대상의 알아차림에서 일탈하지 않도록 붙잡아 두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대상에 대한 집중력을 갖게 한다. 그래서 망상이나 졸음 같은 것으로부터 장애를 받지 않고 알아차림을 할 수가 있다.

순수 위빠사나는 사마타 수행과 달리 여러 가지 대상을 자유롭게 알아차려야 하기 때문에 자칫 산란한 상태에서 수행을 하기 쉽다. 이때 달아나는 마음을 붙잡아 대상에 머물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명칭은 상징성, 지속성, 집중성이 있고 장애로부터도 알아차림을 보호해 주기도 한다. 또한 정신이 몽롱할 때에도 선명하게 알아차리게 한다.

그러나 명칭은 다른 면도 있다. 우선 관념에 빠지기 쉽다. 대상의 성품을 알지 않고 명칭을 알기가 쉽다. 모양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일치성에서 문제가 있다. 세 가지가 하나로 모여야 하는 것은 장애일 수도 있고 장점일 수도 있다. 모아지면 집중력이 생기고 안 모아지면 산란하거나 성품을 알지 못하거나 해서 세 가지의 일치가 이루어져야 하는 복잡함이 있다.

그리고 대상의 느낌, 마음을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명칭은 거친 것이기 때문에 미세한 느낌이나 마음을 알아차리는 데는 장애로 작용한다. 비록 마음속으로 명칭을 붙여서 직접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말은 말이다. 그래서 깨어서 알아차림을 하는 데는 좋으나 고요함에서는 장애가 된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때는 처음부터 명칭을 못 붙이게 한다. 명칭을 붙이는 그 순간에 미세하게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마음을 보기 위해서 그렇다. 마음이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한 순간에 하나밖에 대상을 접수하지 못한다. 명칭을 붙일 때 마음이 얼른 명칭 하나를 접수를 하고 빠르게 다음 것으로 넘어가면 되겠지만 그렇게 될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이미 대상도 빠르게 바뀌므로 명칭을 붙일 때는 명칭 외에는 다른 것을 아는 것이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대상이 알아차리는 마음을 기다려 주지 않으니 명칭을 붙일 때는 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에는 명칭이 매우 뛰어난 효과가 있음을 인정하지만 수행이 차츰 발전된 뒤에는 적절한 시기에 명칭 없이도 수행을 할 수 있다면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명칭에 대한 장단점의 문제가 있다면 사용하는 수행자가 이런 현상을 알고 적절히 사용하면 될 것이다. 명칭도 필요해서 만든 것인 만큼 써야할 때는 사용해야 할 것이다. 무엇이나 작용이 있을 때는 그에 따른 반작용은 항상 상존 하는 것이다. 명칭 사용은 스승의 지침에 따라서 하면 된다. 사용을 할 때에도 허와 실을 알아 조화를 이루면 발전이 있을 것이다.

수행이 진전되면 차츰 지혜가 성숙해지고 이런 단계에서 명칭이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붙여온 명칭이 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다. 만약 명칭을 붙이고 싶지 않다면 이때는 명칭을 붙이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러면 자신이 명칭을 좋아해서 집착하고 있는 마음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명칭이 사라지게 된다. 마음을 알아차려야 뿌리가 무엇인지를 알아 근원적으로 대처가 된다. 그러나 명칭의 필요성을 느끼는 수행자는 계속 주의해서 사용하면 될 것이다.

묘원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