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향기

결혼과 사랑 (에마 골드만)

파라리아 2013. 10. 25. 12:55



“에마 골드만은 매우 명확한 지적 이해를 지닌 역사상 보기 드문 여성 중 한 명이다.”


“아나키즘(Anarchism) 같은 문제들에 대해 생각한 여성은 매우 드물다. 에마 골드만은 그런 여성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참으로 보기 드문 여성이다. 그녀는 너무나 뛰어난 지성을 지녔기 때문에 어떤 남편이라도 그녀를 견디지 못할 것이다. 남편이라면 모두 그녀에 대해 열등감을 느낄 것이다.”


(오쇼, 『공산주의에 부는 선의 바람 선의 불꽃』에서)



결혼과 사랑(Marriage and Love, 1911


에마 골드만(Emma Goldman)

(김시완 번역, 『저주받은 아나키즘』에서 인용)



결혼과 사랑에 관한 일반적인 개념은 결혼과 사랑이 같다는 것이다. 결혼과 사랑은 같은 동기에서 나와 동일한 인간적 욕구를 충족시킨다고 인식한다. 대부분의 일반적 개념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미신에 근거한 개념이다.

   결혼과 사랑은 전혀 공통점이 없다. 이 둘은 북극과 남극 사이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심지어는 서로 적대적이기도 하다. 사랑의 결과로 이루어진 결혼도 있다. 그러나 사랑이 결혼으로 꽃을 피우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인습을 완전히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에 그냥 결혼한다.

   오늘날 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결혼이란 웃기는 장난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그냥 그 인습을 반복한다. 어쨌든 일부의 결혼은 사랑에 바탕을 둔 것도 사실이고, 어떤 사랑은 결혼 후에도 지속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사랑은 결혼과 관계가 없으며, 사랑 때문에 결혼하는 것도 아니다.

   한편 사랑이 결혼 후에 생긴다는 말도 완전히 거짓이다. 드물긴 하지만 결혼 후 사랑이 생겼다는 기적적인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다 깊이 살펴보면 결혼 후 사랑하게 되는 경우도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단지 적응하는 것에 불과하다. 확실히 서로 익숙해지는 것은 자발성이나 사랑의 강렬함과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며 이런 것 없는 결혼 후의 성관계는 남녀 모두의 타락을 입증할 뿐이다.


   결혼은 주로 경제적인 협약이요, 일종의 보험 약정이다. 결혼은 더 구속력이 있고 더욱 정확하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생명보험과는 차이가 난다. 그 보상은 투자한 것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다. 보험금을 타기 위해서 사람들은 돈을 붓다가도 언제든지 해약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결혼한 여성이 얻는 프리미엄이라곤 남편밖에는 없으면서도 지불해야 하는 것은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 자기 이름(서양은 결혼 후 남편 성을 따르므로)과 사생활과 자존심과 심지어는 자기 목숨이다.

   게다가 결혼이라는 보험은 저주스럽게도 평생 동안 사회적으로는 물론 개인적으로도 의존적이고 기생적이고 완전히 무익한 삶을 살게 만든다. 남성도 물론 희생을 한다. 하지만 남성의 영역은 더 넓기 때문에 결혼으로 남성이 여성처럼 많은 제약을 받는 건 아니다. 남성은 경제적 면에서 보다 많은 구속을 느낀다.


   지옥에 대한 단테의 다음 말은 결혼에 그대로 적용된다.

   "여기 들어온 당신은 모든 희망을 버려야 하오."

   우매한 자는 결혼제도가 전혀 실패한 게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이혼 통계수치를 잠깐만 살펴보아도 결혼이 얼마나 가혹한 실패인지 알 수 있다. 전형적인 속물들은 이혼법이 완화되어 여성이 쉽게 이혼을 선택할 수 있게 했기 때문에 이혼이 증가한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앞뒤가 바뀐 말이다. 이혼의 실패를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결혼한 12쌍 중 1쌍이 이혼으로 끝난다.

   둘째, 1870년 이후 이혼은 인구 10만 명당 28명에서 73명으로 늘어났다.

   셋째, 1867년 간통을 이유로 이혼한 사례가 270.8% 증가했다.

   넷째, 처자를 버린 비율이 369.8% 증가했다.

   이런 놀라운 수치 외에도 이혼이 증가추세임을 말해주는 많은 물적 자료와 드라마나 문학 작품들이 있다. 대표적인 작품들로는 헤릭(Herrick)의 『투게더(Together)』, 피네로(Pinero)의『미드-채널(Mid-Channel)』, 유진 월터(Eugene Walter)의『다 갚았음(Paid in Full)』이 있다. 그밖에 많은 작가들이 조화롭고 상호 이해를 증진하는 요소로서 결혼이 얼마나 황량하고 단조롭고 야비하고 부적절한 현실인지 논한다.

   생각이 있는 사회 연구자라면 이런 이혼 현상에 대한 값싼 피상적인 설명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보다 깊은 성생활의 본질을 파헤쳐 결혼이 그토록 재앙이 되는 이유를 밝혀내려 할 것이다.


   에드워드 카펜터(Edward Carpenter)는 모든 결혼의 이면에는 두 성(sexes)이 수행해야 할 다른 환경이 있다고 말한다. 두 사람의 너무 다른 각자의 환경은 남녀를 여전히 이방인으로 남게 한다. 환상, 사회적 관습, 개인의 습관에 따른 극복하기 쉽지 않은 장벽에 의해 분화된 결혼은 서로 인정하고 존경할 가능성을 없애버린다. 상호 인정과 존중이 없다면 결합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모든 사회적 분열을 싫어했던 헨릭 입센이 아마 이런 진실을 처음으로 깨달은 사람일 것이다. 우매한 사람들이 논평하듯 노라가 집을 나간 이유는 자신이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지쳤기 때문도 아니고, 여성의 권리가 필요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 진짜 이유는 결혼생활 8년 동안 노라가 이방인으로 살아왔고 그 남자의 아이나 낳아주는 존재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이방인으로 서로 평생 동안 붙어있는 것보다 더 굴욕적이고 구차한 일이 있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아내는 남편의 수입 외에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남편은 멋진 외모 말고 아내에 대해 중요한 게 또 뭐가 있겠는가? 우리는 지금도 여성에게는 영혼이 없고, 남자의 부속물에 불과하며, 강하지만 자신의 그림자조차 무서워하는 남자의 편의를 위해 갈비뼈로 만들어졌다는 신화를 극복하지 못했다.

   여성이 남성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면 아마 여성을 만든 재료의 품질이 나빠 여성이 열등하게 만들어졌을 것이다. 영혼이 없는 여자에 대해 알고 말게 뭐 있겠는가? 게다가 영혼이 없을수록 아내로서의 여성의 가치는 커지고, 남편에게 흡수되기는 더욱 쉬워진다.

   그토록 오랫동안 남성의 우월성을 유지하는 결혼제도가 지속된 것은 남성의 우월성에 대한 여성의 노예적인 묵종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이 자신을 인식하고, 남편의 울타리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를 자각하게 되면서 결혼이라는 성스러운 제도는 점차 흔들리고 있다. 감상적 한탄만으로는 무너지는 결혼 제도를 유지할 수 없다.


   어릴 때부터 보통의 여자들은 결혼이 여자의 궁극적 목표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이런 교육과 훈육을 통해 여성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간다. 도살하기 위해 살을 찌우는 말 못하는 짐승처럼 여성은 결혼을 위해 준비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여성은 일반 직업교육은 많이 받으면서도 정작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갖추어야할 성교육은 많이 받지 않는다. 정숙한 여자에게는 결혼 후 성관계에 대해 아는 것이 얌전치 못하고 순결하지 못한 일로 여겨진다. 이런 모순이 어디 있는가? 더러운 것처럼 인식된 결혼이 동시에 가장 순결하고 가장 성스러운 결합으로 여겨지고 이에 대해 아무런 문제를 제기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결혼에 대해 일반인들이 지닌 태도이다.

   장차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될 사람이 자신의 유일한 경쟁력이 있는 자산인 자기의 성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다. 이런 상황에서 여자는 한 남자와 평생 지속되는 성관계에 돌입한다. 이 관계는 가장 자연스럽고 건강한 본능적인 성의 발현이 아닌 강압과 폭행과 충격을 받게 되는 관계이다. 결혼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과 불행과 비참함과 스트레스를 겪는 사람 중 다수가 성에 대해 거의 모른다. 이런 무지가 대단한 미덕인 양 찬양되고 있다. 이런 안타까운 상황으로 이혼하는 가정이 많다는 건 전혀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하지만 국가나 교회의 간섭 없이 자유롭고 당당하게 성의 신비를 알게 된 여자는 선량한 남자의 아내로는 부적합하다고 한다. 하긴 여기서 말하는 선량한 남자란 머리는 텅 비고 돈만 많은 남자를 말한다. 생명력과 정열이 가득한 건강하고 성숙한 여성이 자신의 내적 욕구를 죽여 자신의 건강을 해치고 정신을 해치도록 내버려둬야 한다는 생각보다 더한 폭압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 선량한 남자가 나타나 여성을 아내로 데려가기까지 여성은 자신의 비전을 질식시키고 성적인 즐거움을 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혼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이런 결혼의 성사가 어떻게 실패로 끝나지 않을 수 있는가? 이런 결혼은 사랑과 분명 다르다. 그리고 대부분 이런 식으로 결혼이 이루어진다.


   우리 시대는 실용적인 시대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버지의 진노를 사면서 사랑을 하던 때는 더 이상 아니다. 사랑을 한다고 이웃 사람들의 험담거리가 되는 시대도 아니다.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젊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낭만적 사랑에 빠지게 되면 어른들이 이들을 잘 타이르고 교육시켜 정신을 차리게도 한다.

   소녀에게 주입된 도덕적 교훈은 남자가 자신을 사랑하느냐가 아니다. 그 남자가 얼마나 부자냐가 중요하다. 실용적인 미국 생활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요소는 이것이다. 그 남자가 생계능력이 있느냐? 자기 아내를 먹여 살릴 수 있느냐? 생계능력이 결혼을 정당화하는 유일한 요소이다. 이런 사고가 점차 거의 모든 소녀들에게 만연하고 있다. 여자애들은 화려한 쇼핑을 꿈꾼다. 이렇게 영혼이 천박하고 불순한 것이 결혼 제도에 내재된 요소이다. 국가와 교회는 현재의 결혼 제도가 남자와 여자에 대한 국가와 교회의 통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이상적인 대안을 인정하지 않는다.


   물론 사랑을 돈 이상으로 중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경제적 궁핍을 이기고 자립에 성공한 사람들은 사랑을 중히 여긴다. 자립한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여성의 지위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런데 여성이 경제활동을 하는 기간이 짧은 시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런 변화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현재 6백만 명의 여성 임금노동자들이 있다. 이 6백만 명의 여성은 남자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착취당하고, 자기 것을 약탈당하고, 그러면서도 실직을 당해 파업에 동참하거나 굶어죽는다. 이것이 현실 아닌가? 그렇다. 최고급 두뇌 집단에서부터 광산과 철길 노동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현장에 6백만 명의 여성 임금노동자들이 있다. 심지어 형사와 경찰들 중에도 여성이 있다. 이 정도면 여성의 해방도 완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여성 임금노동 전사들 중 극소수만이 남자처럼 평생 일을 하려고 생각한다. 남성들은 아무리 힘들더라도 독립해야 하고 자립할 수 있어야 한다고 교육받아왔다. 남성들은 경제적 수레바퀴에서 진정 벗어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아무리 하찮은 남자라도 어디에 기생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누구에게 기생하여 사는 것이라면 어쨌든 남성은 싫어한다.

   반면 여성은 직업인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임시적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라도 청혼하면 언제라도 직업을 팽개쳐버릴 태세가 되어 있다. 그래서 남성보다 여성으로 조직을 꾸리는 게 훨씬 더 어렵다.

  "내가 왜 노조에 가입해야 해? 나는 곧 결혼해 가정을 꾸릴 거야."하고 말한다.


   여성은 어릴 때부터 가정을 궁극적인 직장으로 여기도록 교육받지 않았던가? 결혼을 하면 여성은 가정이라는 곳이 공장 같은 감옥은 아니지만 견고한 문과 철조망이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곧 깨닫는다. 집에는 남편이라는 충실한 문지기가 있어 아내를 감시하는 것 같다. 하지만 가장 비극적인 면은 여성이 가정에 안주해도 임금노예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런 노예적 임무가 가중된다.

   최근 한 위원회에 제출된 '노동과 임금 및 인구 과잉 문제'에 관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뉴욕시 임금 노동자들의 10%가 결혼한 여성들이다. 이 여성들은 결혼한 후에도 세계 최저임금을 받고 노동을 하고 있다. 거기다 자질구레한 가사노동도 여전히 여성의 몫인 상황에서 무엇이 이런 여성들을 보호하고 가정의 기쁨을 누리게 하겠는가?

   사실 결혼한 중산층 여성조차도 자기 집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집은 남편이 아내에게 제공한 공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남편이 거친 자냐 다정다감한 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남편의 자비가 있어야만 결혼이 여성에게 집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여성은 남편의 집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이러니 세월이 흘러 삶도 인간사도 다 시들해지고 단조로워지고 암울해지면, 소심해져서 바가지나 긁고 툭하면 싸우려 들고 험한 말이나 하고 잘 참지도 못하는 성격이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내는 집을 나가고자 해도 나갈 수 없다.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결혼생활은 자신의 모든 능력을 잃게 한다. 설사 짧은 결혼생활이라 하더라도 여성을 무능력하게 만든다. 외모도 망가지고 동작도 굼뜨게 되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도 못하고, 자기 판단에 겁을 내고, 체중은 늘고 따분함도 증가한다. 이런 것들을 남성은 몹시도 싫어하고 경멸하게 된다. 이 얼마나 삶을 고무시키는 놀라운 제도인가?


   그러나 어린이의 경우 결혼이 아니라면 어떻게 보호될 수 있는가? 이 점이 어쨌든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이 아닌가? 그러나 이것도 속임수요 위선이다. 결혼으로 아이들이 보호된다면 수많은 아이들이 버려지고 집이 없는 상황은 어찌된 셈인가? 결혼이 아이들을 보호한다면서 고아원과 청소년 보호소는 왜 그런 아이들로 북적대는가? 사랑이 많다는 부모들로부터 버림받은 어린 희생자들을 구하기 위해 어린이 보호시설들은 바쁘기만 하다. 이 얼마나 웃기는 현실인가!

   비유컨대 결혼이란, 말을 물가로 끌어오는 정도의 역할은 한다. 하지만 말에게 물을 먹일 수 있는가? 법적으로는 아이를 버린 아버지를 체포하여 죄수복을 입힐 수는 있다. 그러나 아이들의 배고픔은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부모에게 일이 없다면, 남자가 처자식을 버리고 숨어버린다면 결혼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런 사람을 법의 심판대에 세우고 감옥에 넣어 격리시킬 수는 있다. 하지만 감옥에서 그가 노동으로 번 돈은 아이에게 가지 않고 국가로 간다. 이 아이는 아버지가 형을 사는 동안 아주 조금의 돈을 받을 뿐이다.


   여성의 보호와 관련해서 결혼은 저주나 마찬가지다. 결혼은 여성을 보호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여성의 삶은 결혼으로 모욕을 받고 폭압을 당한다. 인간의 존엄성이 무참히 짓밟히고, 여성이 기생하여 살 수밖에 없는 결혼 제도는 영원히 끔찍하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여성을 기생하는 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자로 만든다. 여성의 생활력을 무력화시키고 여성의 사회의식을 말살하고, 여성의 상상력을 마비시킨다. 그리고 그럴듯한 보호막을 씌운다. 이 보호막은 사실 올가미요 인간의 특성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모성이 여성 본능의 극치라고 한다면 사랑과 자유를 구원하는 다른 어떤 보호막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결혼은 여성의 자기실현을 모독하고 짓밟고 타락시킨다. 결혼은 단지 결혼제도를 따르는 것만이 생계를 꾸려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결혼은 여성이 자신을 팔아 모성의 권리를 사지 않는 여성을 구석에 가두고 타락시키고 수치를 느끼게 한다. 결혼은 모성을 허용하기는 하되, 증오심 속에 강제로 임신을 하게 만든다. 그렇다. 모성이 자유로운 선택과 사랑과 황홀감 속에서, 도전적 열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깨끗한 머리 위에 가시관을 씌우지 않으며 사생아를 낳고 저주의 말을 혈서로 새기게 하지 않을 것이다. 결혼이 모든 미덕들을 다 포함한다면 모성에 반하는 범죄들은 사랑의 세계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춰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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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 속에 가장 강력하고 심오한 요소요, 희망과 기쁨과 황홀감의 표시인 사랑은 모든 법과 모든 관습에 저항한다. 사랑은 인간 운명을 결정짓는 가장 자유롭고 강력한 요소이다. 이렇게 강력한 사랑을 어떻게 별 볼일 없는 국가와 교회가 탄생시킨 잡초인 결혼과 동일시할 수 있는가?

   자유로운 사랑? 사랑은 마치 전혀 자유롭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많은 두뇌를 돈 주고 살 수는 있어도 그 누구도 사랑을 살 수는 없다. 지구상의 어떤 권력도 힘으로 몸을 정복할 수는 있어도 사랑을 얻을 수는 없다. 힘으로 다른 나라를 정복할 수는 있지만 어떤 적도 사랑을 빼앗지는 못했다.

   인간이 정신을 구속하고 정신에 족쇄를 채웠지만 사랑 앞에서는 아주 무기력해졌다. 왕관을 쓰고 높은 지위를 누리는 자도 사랑 앞에 서면 그의 모든 것이 초라해진다. 사랑이 머물면 그 곳이 초가삼간이라도 따뜻하고 사랑스럽고 화려한 빛이 비친다. 이렇게 사랑은 거지를 왕으로 만들 수 있는 마력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 사랑은 자유다. 사랑은 오직 자유로운 분위기에 머문다. 자유로움 속에서 사랑은 유감없이 풍요로운 사랑을 베푼다. 일단 사랑이 뿌리를 내리면 어떤 법으로도 어떤 법정도 그 사랑을 뽑아낼 수 없다. 사랑이 뿌리내릴 토양이 황폐하다면 결혼으로 어떻게 사랑의 결실을 맺을 수 있겠는가? 이런 결혼은 죽음에 저항하는 인생의 마지막 절망적 몸부림과도 같다.

   사랑은 보호조치가 필요치 않다. 사랑 자체가 보호막이다. 사랑이 생명을 잉태하는 한 그 생명을 버리지 않으며 굶기지 않으며 애정 결핍으로 말라비틀어지게 만들지 않는다. 이 말이 진실임을 나는 안다. 자유롭게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낳아 어머니가 된 여성들은 사랑의 어머니다. 사랑이 없는 결혼으로 태어난 아이들 중 자유로운 모성애의 발로인 보살핌과 헌신을 듬뿍 받는 아이는 드물다.


   권위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자유로운 모성의 출현을 두려워한다. 자유로운 모성 때문에 자기들의 먹잇감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걱정한다. 누가 전쟁을 할 것인가? 누가 부를 창출할 것인가? 여성이 무차별적으로 아이 낳기를 거부한다면 누가 경찰과 교도관이 될 것인가?

   왕과 대통령과 자본가와 성직자는 "인류! 인류!"를 외친다. 여성이 단순한 기계로 전락하든지 말든지 아이만 낳으면 인류는 존속된다. 저들의 입장에선 결혼이라는 제도가 여성을 유해한 성적 각성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유일하게 안전한 장치이다.

   그러나 이런 속박상태를 유지하려는 광적인 노력들은 모두 허사이다. 교회의 칙령도, 통치자들의 광적인 억압도, 심지어 법이라는 무기도 다 헛된 짓이다. 여성은 가난과 노예의 멍에를 벗어던질 힘도 없고 도덕적 용기도 없는 그런 허약하고 병약한 인류를 생산하는 자로 남아있기를 더 이상 원치 않는다. 대신 여성은 수는 적지만 더 뛰어난 아이들을 원한다. 결혼의 의무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닌 여성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아이를 낳고 사랑으로 양육하기를 원한다.


   우리 주변의 거짓된 도덕론자들은 아이에 대한 보다 깊은 책임감을 배워야 한다. 자유 아에서 사랑이 여성의 가슴속에 깨어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런 여성만이 찬란하고 영원한 모성을 꽃피워 파괴와 죽음만이 서성이는 환경을 생명력 있는 환경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여성이 어머니가 되면 아이들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최상이자 가장 심오한 것을 아이에게 주게 마련이다. 오직 아이 양육에 최선을 다한다. 사랑으로 아이를 길러야만 진정한 남성성과 여성성을 길러줄 수 있다.

   극작가 입센은 알빙(Alving) 여사를 강렬한 필치로 묘사할 때 자유로운 어머니 상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알빙은 결혼의 울타리를 뛰어넘고 결혼으로 인한 모든 문제들을 뛰어넘었다는 점에서, 자신의 족쇄를 끊고 자유로운 정신을 고양시켜 강력하고 새롭게 탄생한 한 인격체로 돌아갔다는 점에서 이상적인 어머니다.

   그러나 오스왈드라는 이상적인 남성을 만나 자기 삶의 기쁨을 누리기엔 너무 늦고 말았다. 다만 자유 안의 사랑이 아름다운 인생의 유일한 조건임을 분명히 깨달았다. 알빙 여사처럼 자신의 정신적 각성을 이루기까지 피눈물을 흘린 사람들은 결혼을 강제적 제도 내지 피상적이고 공허한 사기극이라고 비난한다. 각성된 자들은 사랑이 잠시 동안 지속되든 영원히 지속되든 사랑만이 새로운 인류,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창조적이고 강력한 유일의 토대임을 안다.


   현재와 같은 형편없는 국가에서 사랑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낯선 존재다. 잘못 이해되고 경원시되어 좀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뿌리를 내리더라도 곧 시들어 죽고 만다. 사랑이라는 섬세한 조직은 일상적 압박과 스트레스를 견뎌 낼 수 없다. 사랑의 영혼은 너무나 복잡 미묘하여 사회의 더러운 구조에 적응하여 뿌리를 내릴 수 없다. 사랑은, 사랑을 필요로 하지만 사랑이라는 정상에 오를 능력이 없는 사람들과 더불어 울고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나 언젠가는 남성과 여성이 함께 산 정상에 오르게 될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당당하고 강인하고 자유로운 모습으로 만나 사랑이라는 황금빛을 받아들이고, 그 빛에 참여하고, 그 빛을 쬘 준비가 될 날이 올 것이다. 어떤 시적 상상력과 환상과 꿈도 남성과 여성 사이의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는 사랑의 힘에 근접하는 것을 만들어낼 수 없다. 이 세상이 진정한 동료애와 하나됨을 낳는 것은 결혼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부모를 통해서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