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피우기

확실성에 관하여

파라리아 2009. 6. 7. 04:30
 

사람들은 언제나  확실성을  갈망해 왔다. 삶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 중 하나가 바로 불확실성이기 때문이다. 삶도 불확실하고 이 세계도 불확실하다. 도대체 나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것이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다. 나아가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나의 욕망이 이루어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등, 주위가 온통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어쩌면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함으로써 확실성을 찾으려는 시도는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확실성을 찾는다는 것은 존재의 의미에 대한 확실성을 찾는 것이다. 과학과 종교는 이러한 물음에 ‘어느 정도’ 확실한 답을 준다. 과학의 견지에서 보자면 생물이 존재하는 목적은 자신의 유전자를 후손에 전달하여 종(種)의 진화에 기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인간도 생물종의 하나이므로 인간의 삶 역시 결혼해서 자손을 낳고 그 자손을 키우는 것이 목적일 것이다. 실제로 사람들의 삶을 보면 역시 그러한 생물학적인 목적에 매우 부합하는 방식으로 살고 있다.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는 방식을 보면, 대개 이러한 종족 보존과 관련된 일에서 인생의 행복을 느끼는 것 같다. 이성(異性)을 만나고, 섹스하고, 결혼해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데에서 큰 행복을 느낀다. 사람들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이러한 일들에서 큰 행복을 느끼고 삶의 의미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역시 자연이 종족 보전을 위해 그런 식으로 프로그램화시켰다면 꽤 설득력 있는 설명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자기 자신의 존재 목적이 단지 종족 보존의 한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든 씁쓸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종교 역시 존재 의미에 대해 확실한 답을 준다. 인간은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식의 설명도 있고, 인간은 끝없는 윤회 과정을 통해 일자(一者)와 합일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설명도 있다. 이런 종교적인 확실성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철학보다는 종교의 영향이 훨씬 크고 광범위하게 미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사실 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들 말고 누가 철학에 관심을 돌리겠는가. 이 세상에는 과학에 의지하거나 종교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 철학에 의지하는 - 의지한다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 사람은 극소수이다.

  

그러나 과학적인 확실성도, 종교적인 확실성도 모두 엄밀한 의미에서의 확실성은 아니다. 적어도 철학은 그러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과학적인 연구의 결과로 도출할 수 있는 확실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만일 인간의 존재 의미가 인간이라는 생물종을 유지시키는 데에 있다고 결론짓는다면 이 결론은 또다시 여러 질문을 낳을 수 있다. 생물종은 왜 유지되어야 하고, 진화해야 하는가. 그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진화는 외부의 힘이 없이 전적으로 독립적으로 진행되는가, 아니면 어떤 외부적인 진화 프로그램 같은 것이 있는 것인가, 등등. 학자들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또 열심히 연구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은 매우 의미가 있으며, 이 세계와 인간에 대한 지적인 이해를 크게 향상시켜 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방식으로는 결코 궁극적인 확실성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근본 원인을 추구하는 일련의 사슬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확실성 역시 근본적으로 맹목적인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결코 진정한 확실성은 아니다. 무조건 믿으라고 말하는 것은 확실성이 아니라 그저 확실하다고 믿으라는 강요에 불과하다. 확실성이란 마음에서 의심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가 풀려서 더 이상 질문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완전히 풀린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이다. 첫째, 그 원인을 계속 탐구해 나가는 것이다. 원인의 원인을, 또 그 원인의 원인을 계속해서 탐구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향상되는 것은 과학적인 지식이다. 물질의 원인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그 물질을 구성하는 원소들을 밝혀내야 하며, 또 그 원소들을 분석해야 하고, 또 그 원소를 구성하는 분자들, 분자를 구성하는 원자... 이런 식으로 원인의 원인을 계속해서 탐구해야 한다. 인간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도 이미 유전자 수준까지 밝혀내지 않았는가. 그러나 과학적인 탐구는 적어도 생산적인 지식을 도출할 수는 있지만 최종적인 확실성에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또 만일 이론적、형이상학적으로 존재의 의미를 탐구한다면 그다지 생산적인 대답을 얻을 수는 없겠지만 역시 이런 식으로 계속 원인의 원인을 생각하는 방향으로 흐를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방식의 생각들이 있을 수 있다. 존재의 의미를 어떤 근원적인 존재, 神에 귀속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神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단계에 오면 논의는 매우 소모적으로 된다. 다시 말해, 무한한 논리적 반복 속에 빠져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둘째, 우리는 존재의 의미와 원인을 묻는 마음 자체에 대해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마음 혹은 우리의 사고(思考) 자체가 기본적으로 이렇게 원인을 묻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마음에게 어떤 훌륭한 대답을 주어야 마음이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이 대답은 완벽하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질문이 필요 없는 확실성을 찾았다!”라고. 나는 마음이 그런 확실성을 찾을 수 있다는 데에 회의적이다. 내가 보는 한, 언제나 이유를 묻는 마음으로는 결코 확실성에 도달할 수 없다. 항상 이유를 묻는 마음, 그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는 것이다.

 

20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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