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피우기

언어의 자기 지시적 모순

파라리아 2009. 6. 7. 04:34
 

언어에는 이른바 자기 지시적인 모순이 있다. 예를 들면, “도(道)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라고 말하면,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했기 때문에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그는 도에 대해서 질문을 받았을 때, 아무 대답도 하지 말아야 아무런 모순 없이 정확한 대답을 한 셈이 될 것이다. 또, “모든 것은 변화한다.” 라고 말하면,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그 말 자체도 변화해야 하기 때문에 역시 자기모순을 초래한다. 이런 식의 자기 지시적 모순은 매우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자신의 주장 자체가 어기고 있는 상황 말이다. 나 자신이 한 말들을 살펴봐도 이런 자기 지시적 모순을 범하고 있는 부분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자기 지시적 모순에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꼭 논리적으로 수미일관(首尾一貫)한 주장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째서 내가 나의 말들이 이전에 내가 한 말들과 논리적으로 일관되도록 맞추어야 한단 말인가. 나는 논리적으로 일관된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나는 오히려 순간순간의 느낌에 더 충실하려고 한다. 삶은 결코 논리적으로 일관되어 있지 않다. 나는 그저 그때 그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쓸 뿐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내가 진실을 지향하고 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그 진실성을 강하게 느끼는 어떤 것을 쓸 때, 그것은 적어도 그만큼의 진실성을 지니고 있다. 누군가 인간은 본래 악(惡)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적어도 인간에게 그런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누군가 인간이 본래 선(善)하다고 말할 때, 그것 역시 인간에게 선한 부분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 말들 안에는 사실 훨씬 더 많은 내용이 함축되어 있으며 우리는 그 말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단순히 단어 몇 개로 구성된 명제나 혹은 그 명제를 타당하게 만들어 주는 논증만으로 그 진위 여부를 가리려는 것은 이 세상을 너무 단순하게 파악하려는 순진함이다. 한 명제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는 노력보다 그 명제가 자기모순을 범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해서 그 명제의 가치를 끌어내리려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라는 말은 물론 그 자체가 모순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란 용어에는 그 명제 자체까지도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렇게 말해 주어야 더욱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그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변화한다.(Everything changes except 'that everything changes' itself.)” 그러나 훌륭한 철학자는 이렇게 정확한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하도록 기대될지라도, - 나는 철학자들이 되도록 엄밀하게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모든 사람에게서 이런 식의 엄밀한 언어 사용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한 시골 농부가 오랜 세월을 살며 체험한 삶의 깨달음을 말한다고 하자. 우리는 그에게서 엄밀한 언어 사용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자주 논리에 맞지 않는, 엉성한 표현을 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의 말이 의미가 없는 것인가? 그는 분명히 우리가 쉽게 얻을 수 없는 삶의 진실을 이야기해줄 수 있을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언어와 논리가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20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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