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피우기

수미일관(首尾一貫)한 설명의 어려움

파라리아 2009. 6. 7. 04:28

 

나는 살아가다가 문득 번뜩이는 생각들을 하는 경우가 많다. 삶에 대해서 핵심적인 통찰을 주는 생각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러면 그 생각을 노트에 적는다. 그 때 그것은 몇 줄 안 되는 짧은 생각의 단편이 된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학교 다닐 때부터 자신의 생각을 ‘논리정연하게’ 써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리고 그 기준은 대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얼마나 논리적이고 타당하게 제시하는가에 있다. 이것은 대입 논술 고사에서도 좋은 답안의 기준으로 제시된다. 이렇듯 우리는 언제나 근거와 이유를 만들어 내는 데에 익숙해 있다. 그래서 나 자신도 앞에서 말한 것 같은 번뜩이는 생각의 단편을 적어놓고서, 그 다음에는 그 생각에 이유와 근거를 붙여 한 편의 논리정연한 논증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를 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매번 이러한 시도에 어려움을 겪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합리화 과정에서 종종 나의 처음 생각의 의도와 빗나가게 되는 경우가 많고, 또 논리적으로 일관된 증명을 하려고 하면 처음에 생각지 못했던 모순들이 하나둘씩 생겨나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합리화에 있어서 그런 어려움에 봉착한다면 나의 처음 생각은 틀린 것일까?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나의 처음 생각의 진실성을 믿는다. 그것은 분명히 진실이며 삶에 대한 직관적 통찰이었다.

  

문제는 완벽한 설명을 해내려는 욕망인 것 같다. 삶에 대한 통찰은 삶의 체험 자체와 그에 대한 나의 반성적 성찰의 결과로서 주어진다. 따라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삶의 체험이라는 조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생각을 보편화시키고자 하는 경향이 있는데, 특히 철학자에게는 더욱 그런 보편화、일반화에 대한 열망이 내재화되어 있는 듯 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해 주기를 바란다. 그런데 자신의 생각을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시키기 위한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소위 객관적 증명이라는 방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객관적 증명이라는 것 자체가 역설(逆說)적이다. 자신의 생각은 자신의 삶의 체험과 동떨어질 수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과 똑같은 체험을 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일한 방법은 언어를 사용하여 타당한 증명을 구성해 내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러면 그 사람의 글을 읽은 사람 중에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그 증명 과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할 것이다: 당신의 결론을 틀렸다. 왜냐하면 당신의 논증 과정의 이 부분에서 앞뒤가 타당하게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혹은 이러이러한 변수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거기에 대해 반박을 해야 한다. 내가 구성해 낸 논증을 방어해야 하는 것이다. 소모적인 논쟁이 시작되는 것은 여기서부터다.

  

나는 수미일관(首尾一貫)한 완벽한 이론을 만들려는 노력은 가능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버트란드 러셀이 어느 책에서 말했듯이, 진실에 충실하고자 하면 자신의 이론들 사이에 모순이 즐비하게 되고 일관된 논리로 꿰려고 하면 자신의 이론은 진실에 맞지 않는 이상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나는 모순을 허용하더라도 진실에 충실한 쪽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본다. 왜냐하면 언어는 언어 자체의 논리가 있지만, 이 세계는 세계 자신의 논리가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세계를 표상하는 기호에 불과하다. 세계가 달이라면 언어는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다. 언어는 세계라는 광대한 바다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의 세계에서 모순처럼 보이는 것이 세계에서는 모순이 아닐 수도 있다. 인간 자체가 이미 그렇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존재는 아니지 않은가?

 

2003. 12.

'망상피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확실성에 관하여  (0) 2009.06.07
격언 투로 씌어진 고전의 가치  (0) 2009.06.07
이론과 삶의 체험  (0) 2009.06.07
과학과 종교가 철학에 미치는 영향  (0) 2009.06.07
명(命)에 대한 생각  (0) 2009.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