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향기

열망하지 마라 - 그러면 그것은 일어난다

파라리아 2012. 11. 9. 22:03


질문:

당신은 우리에게 깨달음을 열망하지 말라고 계속 되풀이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또한 당신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빈약하고 얼마나 쓰레기 같은지. 그리고 깨달음이 얼마나 지극한 기쁨이고 풍요로움인지 반복해서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쓰레기보다 지극한 기쁨을 선호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OSHO :

선호, 무엇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무엇을 다른 것보다 더 좋아한다면 그 다른 것을 놓칠 것이다. 쓰레기보다 지극한 행복을 더 좋아한다면 그대의 지극한 행복이라는 개념은 이미 쓰레기다. 그대가 무엇을 선택하지 않고, 깨어있는 상태로, 무엇을 선호하지 않는 상태로, 선택 없는 깊은 자각의 상태로 남는다면, 쓰레기 그 자체도 지극한 행복이 된다; 쓰레기와 지복(bliss)은 둘 아니다. 만일 그대가 무엇을 더 좋아한다면 모든 것이 쓰레기가 되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지극한 행복이 된다. 


속세와 열반은 둘이 아니다. 이 세상은 그대의 선택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만일 선택이 사라진다면, 이 세상도 사라진다. 돌연히 깨달음 외에는 아무 것도 없게 된다. 


그것은 바로 그대의 눈앞에 있다. 선택하라, 그러면 그것을 잃을 것이다. 왜냐하면 선택한다는 것은 마음이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선택이 마음이다. ‘나는 이것을 택하고 저것은 택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그대는 이미 세상을 둘로 나눈 것이다. 이원성이 들어온 것이다. 이제 비이원성은 사라졌다. 하나는 사라졌다. 하나 됨은 더 이상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그대가 선택하지 않는다면, 이원성은 사라진다. 왜냐하면 이원성은 선택으로 만들어지지 때문이다. 선택으로 그대는 이원성을 지지한다. 이원성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대가 선택으로 그것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미 거기에는 아무 것도 선택할 것이 없고 선택할 사람도 없다. 


깨달음은 그대가 선택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다. 거기에 선택이 없을 때, 남게 되는 것이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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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대의 어려움을 이해한다. 왜냐하면 선택이 계속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대는 선택하지 않는 것조차 선택한다. 내가 무선택이 문이라고 주장하면 그대는 ‘그것’을 선택하기 시작할 수도 있다 - 그러나 그때 그대는 놓칠 것이다. 나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무언의 이해만이 필요할 뿐이다.


단지 나를 듣는 것만으로, 만일 그대가 그것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이미 일어난 것이다. 또 달리 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떻게‘라고 묻지 마라.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려고만 하라; 욕망을 끌어들이지 마라. 이해가 명확해지게 하라.


그대가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말할 때, 그대는 존재의 일부를 잘못으로 부정한 것이다. 이제 그대는 결코 전체가 될 수 없다 - 그리고 깨달음은 전체에 속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전체가 꽃을 피우는 것이다. 부분은 깨달을 수 없다. 오직 전체만이 깨달을 수 있다. 만일 그대가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 나는 이것을 선택하고 저것은 거절한다,’라고 말한다면 누가 거절하고 누가 선택하고 있는 것인가? ‘나’라는 것, 그 에고가 존재를 칼처럼 둘로 자르고 있다. 그것을 이해한다면 구분하지 마라. 나누어지지 않은 존재에 부족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때 그대는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것’이 일어난 것이다.


당신은 우리에게 깨달음을 열망하지 말라고 계속 되풀이하여 말씀하십니다 - 그렇다. 왜냐하면 열망은 속박이기 때문이다. 소위 종교라는 것들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열망하라고 가르쳐 왔다. 그들은 많은 혼란을 야기시켰다. 나는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다. 단지 그대의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그 모든 혼란을 몰아내고 있는 것뿐이다. 그들은 말한다: 속세를 열망하지 마라. 속세의 물건을 탐하지 마라. 돈을 구하지 마라. 권력과 권위를 구하지 마라 - 신을 열망하라, 깨달음을 열망하라, 천국을 구하라. 선을 구하라. 그러나 그대가 선을 열망하고 신을 열망할 때, 그대 안에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열망의 대상만이 달라졌다. 열망은 똑같이 남는다. 처음에 그대는 돈을 열망하고 있었다, 이제 그대는 신을 열망한다. 대상이 달라졌다. 이제 그대는 내세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대가 어떤 변형의 과정을 거쳤는가? 그대는 아직도 열망하고 있다. 


열망의 속성은 똑같다. 그것은 대상에 의존하지 않는다. 신이나 돈이나 아무런 차이도 없다. 그대가 열망한다는 사실 -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열망 속에서, 그대는 미래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열망으로 그대는 이미 현재의 순간을 놓쳤다. 열망한다는 것은 그대가 지금 여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이제 마음은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마음이 다른 데로 가버렸는데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즐길 수 있겠는가? 마음이 여기에 없을 때, 이미 그대 위로 쏟아져 내리는 것을 어떻게 그대가 즐거워할 수 있겠는가? 삶은 계속 쏟아져 내리고 있다. 신이 계속 그대를 감싸고 있다. 그러나 그대의 마음은 어디 다른 곳으로 - 미래로, 어떤 결과로, 열망으로 가버렸다. 그대가 놓치는 것이 바로 이런 식이다. 


열망은 그대에게 존재하지도 않는 곳으로 움직이게 공간을 만들어준다. 그대는 항상 여기에 있다. 그대의 존재는 항상 현재에 있다. 그러나 열망은 존재하지 않는 다른 세계를 창조할 수 있게 도와준다. 


돈을 열망하는 사람을 보라. 그는 만 루피가 있다 - 그러나 그는 그 돈을 즐기지 못한다. 백만 루피를 열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불행해 한다. 만 루피나 되는 돈이 그를 부자로 만들지 못한다. 그는 불행하다. 그가 열망하고 있는 백만 루피가 그를 가난하게 만든다. 그는 백만 루피가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즐길 것이다. 


그렇지만 그때가 되면 그가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백만 루피를 벌면 마음은 또 다시 움직인다. 왜냐하면 마음은 움직이는 기술을 배웠기 때문이다. 만 루피에서 백만 루피로, 백만 루피에서 일억 루피로 움직일 것이다! 그 비율, 그 거리는 항상 똑같이 남는다. 그가 백만 루피에 도달할 때, 마음은 이미 일억 루피를 열망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백만 루피를 즐기지 못한다. 백만 루피로도 그는 부자가 아니다. 일억 루피 때문에 그는 가난한 것이다. 


그대가 명상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대는 그대에게 일어나는 것을 즐기지 못한다. 그대의 마음은 깨달음을 생각하고 있다. 나는 말한다. 깨달음이 일어날 수 있다 하더라도 - 그것은 불가능하다 - 그대는 그것을 즐기지 못할 것이다. 그대의 마음은 또 다른 ‘위대한‘ 깨달음으로 움직일 것이다. 계속 움직이는 것, 그것이 열망의 속성이다. 만일 신이 그대 앞에 서 있다 하더라도 그대는 이미 다른 위대한 신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 이 신은 아니다. 충분하지 않다. 만족스럽지 않다.


마음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된다. 마음의 기능에 대한 무언의 이해 - 그러면 그대는 갑자기 웃기 시작할 것이다; 모든 속임수를 이해한 것이다.


그때, 문제는 대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열망을 버리는 데에 있다 - 내가 ‘열망을 버린다’고 말할 때, 제발 나를 오해하지 마라. 나는 ‘그대’가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무언의 이해가 있을 때, 그것은 떨어져 나간다. 그때 갑자기 그대는 핵심을 본다; 삶은 여기에 있고 열망을 저기에 있다는 것. 그대는 핵심을 본다 - 그리고 열망은 사라진다. 그것은 마치 그대 주변에 있는 한 줄기의 연기와 같다. 연기는 실체가 없다. 그것을 밀 필요도 없다. 그대가 이해하면 그것은 이미 사라져 버린 상태다. 


그대가 열망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어떻게 그것을 버릴 수 있겠는가? 그대는 다른 열망이 대체될 때, 오직 그때만 열망을 버릴 수 있다. 내가 ‘돈에 대한 열망을 버려라. 왜냐하면 그러면 신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 - 그대는 버릴 수 있다. 내가 대체되는 대상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오래된 것을 버릴 수 있다 - 왜냐하면 그대는 이미 그 오래된 것에 실망하고 싫증나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새로운 대상이 며칠간은 열망을 도와줄 것이다. 그런 뒤 그대는 그 열망을 또 다시 버릴 수 있다.


열망이 허락하면 대상은 버려질 수 있다. 마음은 대상에 개의치 않는다. 그대가 열망을 버릴 때, 마음은 사라진다. 마음이 열망이다. 마음은 실재가 아니다. 마음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단지 과정일 뿐이다. 열망하는 과정일 뿐이다. 그대가 무엇을 열망한다? 거기에 마음이 있다. 그대가 열망하지 않는다? - 거기에 마음이 없다. 그리고 마음이 없을 때, 깨달음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위해 뭔가를 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니다. 나는 단순히 이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지켜보라. 긴장을 풀고 지켜보라. 그러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그러나 내 말을 들으면서 그대는 욕심을 내기 시작한다. 그대는 이렇게 느끼기 시작한다: 깨닫는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신을 깨닫는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그대는 욕심을 내기 시작한다 - 그 욕심을 지켜보라. 그렇지 않으면 신은 대상이 될 것이고, 모든 대상은 세상에 속하는 것이다. 내세에 속하는 대상은 없다. 모든 대상은 시장에 속해 있다. 시장에서 파는 상품이 아닌 다른 대상은 없다. 왜냐하면 그대의 열망을 도와주는 것은 무엇이나 그대가 이 쓰레기 속에, 이 악몽 속에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마라. 나는 열망을 버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순히 열망의 과정을 이해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이해하는 순간 그대는 그것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또한 우리의 삶이 얼마나 빈약하고 얼마나 쓰레기 같은지. 반복해서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대의 삶은 쓰레기다. 그리고 어마어마하게 행복한 존재의 방식이 있다. 나는 그대가 살고 있는 방식은 삶의 방식이 아니라 죽어가는 방식이라는 것을 거듭 반복해서 상기시켜야 한다. 그대는 단지 자신을 죽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오로지 무한한 지복만이 존재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을 그대에게 상기시켜야 한다.


그러나 나는 선택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내버려두고 저것을 선택하라고,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성취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다. 나는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성취하려는 마음이 쓰레기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성취하지 않는 마음은 더 없이 행복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일이 항상 있어왔다; 붓다, 예수, 노자 - 그들은 한 번도 이해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이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아주 깊이 오해받아 왔다. 그들이 말한 것들은 완전히 다른 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다. 완전히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른 차원에서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조직을 만들고 방법론을 만들고 수없이 많은 것을 만들어오고 있다 - 그러면서 전체적인 핵심을 놓치고 있다. 


그 핵심은 아주 간단하다. 지식이나 많은 지성이 필요하지 않다. 단지 순수성, 순진무구한 지켜봄만 있으면 된다. 


그러므로 나를 지켜보라. 그리고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음악을 듣듯이 귀 기울여 들어라. 음악은 많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음악은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 그것은 그저 소리일 뿐이다. 그러나 음악은 그대에게 미지의 무엇인가를 전해 준다. 음악을 듣듯이 내 말을 들어라. 다른 차원을 들어라; 나를 해석하려고 하지 마라. 마음속에서 나를 번역하려고 하지 마라. 그냥 귀 기울여 들어라. 더 지적이 되려고 하지 말고 더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라. 어느 것도 놓치지 않기 위해 더 의식하려고 노력하라. 그러면 어느 날 - 그 날은 예측할 수 없다. 아무도 언제라고 말할 수 없다 - 그대는 동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밤이 사라진다. 밤은 거기에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단지 환상이었을 뿐이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사람들이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얻었습니까? 그가 말했다: 아무 것도 없다. 나는 아무 것도 달성하지 못했다. 나는 단지 내가 찾으려고 했던 것이 항상 내 안에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찾으려고 했던 것이 곧 찾고 있었던 나였다. 나는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나는 단지 인식했을 뿐이다. 나는 단지 자각에, 깨어있음에 이르렀을 뿐이다. 나는 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완벽했었다. 


이 존재 안에 아무 것도 불완전한 것은 없다. 불완전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전체는 너무도 완전하기 때문이다.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완전하다. 완전으로부터는 완전만이 나올 수 있다. 그러니 어떻게 불완전이라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당신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어디에선가 그대는 불완전이라는 개념을 창조해냈다. 그렇지 않다면 어느 누구도 불완전하지 않다. 그대가 붓다다! 그대는 그것을 알 수도 있고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알든 모르든 선택하는 것은 그대 몫이다. 그러나 그대의 실재는 붓다의 실재다. 그대들은 이름 없는 신들이다. 스스로를 알지 못하고 있지만 모두 신들이다. 어쩌면 깊이 잠에 빠져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고 있든 깨어 있든 신은 아직도 신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에게 말을 해야 한다. 매 순간 순간이 무한한 행복인, 매 순간 순간이 환희인 존재의 방법이 있고 그대는 쓰레기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열망은 쓰레기를 만들 것이므로 제발 열망을 만들지 말라고 계속 반복해서 말해줘야 한다.


실체를 이해하라. 그리고 열망이 그대 손에서 빠져나가게 하라. 


돌연 - 그것은 항상 단계적인 과정이 없는 돌연이다 - 그대는 깨어난다. 아침이 왔다.  그대는 집에 돌아와 있다. 


그대는 쓰레기보다 지극한 행복을 선호하는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 묻는다. 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쓰레기를 만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일이다. 나는 알고 있다. 그대의 어려움을 이해한다. 나도 똑같은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대의 어려움을 알고 있으니 제발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려고 하라. 나도 똑같은 어려움을 겪었다. 신에 대한 열망을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어떤 것이 아름다고 지극히 행복하다는 것을 이해할 때 그것을 열망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내가 잘 안다. 그러나 서서히 그대는 요령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열망할 때마다 그것을 놓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열망이 놓치게 되는 원인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오직 경험으로부터 온다. 그대는 여러 번 넘어질 것이다. 그러나 낙담하지 마라. 다시 일어나라. 그리고 또 가라. 여러 번 넘어질 것이고 또 열망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미묘해서 그대가 선택하지 않았다고, 선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어도 실제로는 이미 선택해버린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가 더 깨어있을수록 어느 날엔가 그것은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일어났다. 나도 같은 곤경에 처해 있었다. 나도 똑같은 어려움을 겪었다 - 지극한 행복을 어떻게 열망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열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열망 없는 상태로 있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고 단지 존재하기만 할 수 있을까. 나는 안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 그러나 그렇게 된다. 불가능한 것이 가능해진다. 정말로 기적이다. 


그것은 일어났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이 그대에게도 일어날 것임을 알고 있다. 단지 끈질기게 계속하라. 실수에 낙담하지 마라. 다시 일어나라. 다시 해보라. 그것은 어둠 속에서 더듬는 것이다. 그러나 문은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계속 더듬어 가면 언젠가는 문을 찾게 될 것이다. 


종교가 절대로 과학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 절대로 안 된다! 종교는 항상 더듬는 일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잘해봐야 예술 정도가 될 수 있고 그것도 너무 미묘해서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강조한다: 계속 더듬으라고.


어느 날 그것은 일어난다. 어떻게 일어나고 왜 일어나는지는 신비로 남는다. 사실 어느 누구도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만일 누군가가 그것을 말할 수 있다면 과학이 생겨날 수 있다. 그러면 그대는 기술을 알게 되고 어떤 특정한 행위를 할 수 있고 그러면 그것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수백만 번이나 일어났지만 거기에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밝힐 수가 없다. 그것은 일어날 수 있다. 매번 일어날 때마다 그것은 유일무이하게 일어난다. 매번 그 전에는 일어난 적이 없었던 새로운 방식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또 다시 그런 식으로 일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각각의 개인은 서로 너무도 다르고 유일무이하고 너무도 개인적이기 때문에 항상 다르게 일어나게 되어 있다. 내가 계속 상기시킨다고 해서 그것을 열망하지 마라. 그것이 일어나게 받아들여라 - 열망하지 마라. 열망하게 되면 그대는 능동적이고 공격적이 되며, 받아들이게 되면 단지 깊은 수용성 속에서 기다리기만 한다. 문가에 서서 손님을 기다리는 것...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손님이 오면 오는 것이다. 그대는 받아들일 준비만 하면 된다. 그것이 전부다.


열망하지 않음은 수용성을 낳는다. 열망은 그대를 공격적으로 만든다. 열망은 그대를 능동적으로 만들고 열망하지 않음은 그대를 수동적으로 만든다 - 노자가 무위(無爲)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비활동에 의한 활동, 행위 없이 행위하는 것이다.


열망하지 마라 - 그러면 그것은 일어난다. 열망하라 - 그러면 그대는 놓칠 것이다. 선택하지 마라, 그러면 그것은 거기에 있다. 구하라 - 끝없이 구하라, 그러면 그대는 결코 그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깊은 수용성.


열망의 기제는 이렇다; 만일 그대가 열망하면 그대의 에너지 전체가 능동적이 되고 공격적이 된다 - 에너지는 움직인다. 남성이 된다. 만일 그대가 열망하지 않으면, 똑같은 에너지가 수용성이 된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 곳에도 가지 않는다. 단지 기다릴 뿐이다. 깊이 기다린다. 여성이 된다. 그러므로 노자는 여성적인 에너지를 주장한다. 


세상은 남성적 에너지의 발현이다. 그리고 깨달음, 내세, 피안은 여성적인 에너지의 발현이다. 


사랑받는 사람처럼 기다려라. 그러면 어느 순간에 그것은 일어날 수 있다 - 그대는 놀랄 것이다! 그것이 일어날 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놀란다 - 그가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았는데 일어났다는 사실에 놀란다. 깜짝 놀란다! 믿을 수가 없다! 사실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터무니없이 보인다! 그가 이것저것 다 하고 있을 때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는데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았더니 갑자기 일어났기 때문이다. 


무위 속에서 그대의 에너지는 깊은 휴식을 취한다. 에너지는 순수하고 고요해진다. 


신은 항상 그대 앞에 있었다 - 바로 그대의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그대의 눈은 열망으로 흔들리고 있다. 그 열망을 떠나보내라. 눈은 더 이상 흔들리게 하지 마라. 고요히, 조용히 있어라 - 그러면 갑자기 그것은 거기에 모습을 드러낸다. 



- OSHO, <Tao : The Three Treasures> VOL. 4, CH. 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