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피우기

과학과 종교가 철학에 미치는 영향

파라리아 2009. 6. 7. 04:24

 

사변적(思辨的)인 철학은 과학과 종교의 산출물에 매우 강하게 영향을 받는 듯 하다. 사실 우리들의 세계관을 결정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들은 거의 대부분 과학과 종교로부터 왔다. 중세까지는 종교적 세계관의 역할이 컸고, 근대 이후 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한 이후로는 과학적 세계관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철학이 인간의 세계관 형성에 미치는 역할은 과학과 종교에 비하면 매우 미미하다. 오히려 철학은 과학과 종교가 이루어 놓은 업적을 뒤에서 정리하고 비판하는 작업 정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서양철학의 주요 논제들을 제시했다고 하는 플라톤이 피타고라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플라톤이 수학을 중시하는 것이나 이데아, 영혼 불멸 등의 사상을 가진 것은 피타고라스의 영향을 보여준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일종의 종교적 집단이었다. 플라톤을 위시한 철학에서 신(神), 영혼, 존재의 궁극적 본질 등의 문제를 다루는데, 이러한 개념들이 순수한 사변을 통해서 처음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는 이러한 개념들은 먼저 어떤 뛰어난 종교가(宗敎家)의 종교적 체험이 있었고, 그 체험을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용어나 개념들을 만들어 내었으며, 소위 사변적인 철학자들은 그러한 뛰어난 개념들을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사상을 전개해 나가는 순서로 진행되어 온 것 같다. 따라서 신(神) 개념을 아무리 분석해 보아도 그 본질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이라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철학이 아닌 종교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어떤 철학자들은 마치 신이라는 개념이 순수한 사변의 결과로서 도출될 수 있는 것처럼 설명하는데, 나는 이런 식의 설명은 언어유희(言語遊戱)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지금은 불가지론(不可知論)적인 견해가 지배적이어서 상황이 많이 다르긴 하지만, 신에 관한 문제、그리고 영혼에 관한 문제도 한때는 철학자들의 진지한 탐구 대상이었다. 그런데 인간에게 영혼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철학적 사변의 결과인가? 나는 영혼의 문제 역시 기본적으로 종교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본다. 단순화시킨 것이긴 하지만, 플라톤의 철학은 피타고라스적인 종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서양 중세 철학은 유태교와 기독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한 시대의 사상이 예수라는 한 종교적 인물의 절대적 영향 하에 있었던 것이다. 서양에 있어서도 종교가 이룩한 위대한 업적들에 비해 철학이 해 놓은 것이 무엇인가?

 

동양의 사상에 있어서도 종교의 역할은 대단했다. 사실 동양에 있어서는 종교와 철학이 잘 구분되지 않는다.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엄밀한 방식의 논리적、분석적、이성적인 철학은 동양에서 잘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고대 중국에 있어서 순자(荀子) 같은 사람은 서양적 의미에서 상당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한 사상가이고, 마키아벨리식의 글을 쓴 한비자(韓非子)도 있었으며, 송(宋)나라의 주희(朱熹)도 매우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사상사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는 도교와 불교 계통의 사상을 보면, 노자(老子)와 붓다라는 위대한 종교적 인물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고 있다. 중국 사상에서 인식론과 본체론의 주요 개념들은 거의 대부분 노자와 붓다 계열의 사상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그리고 철저하게 현세의 인간관계 중심의 철학을 추구하던 유가(儒家) 역시 나중에는 그들의 강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근대 이후는 과학의 시대다. 과학적 연구의 결과로 우리는 지구가 둥글고, 자전하며, 태양의 중심을 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태양계 내에는 지구 말고도 많은 행성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로써 이전의 신화적인 세계관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하늘에는 하늘나라 같은 것이 없으며, 땅 속에도 지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인간의 몸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세포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게 되었고, 생물이 진화한다는 것과 유전자 복제를 통해 종(種)이 이어져 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과학적 발견의 충격은 가히 혁명적이다. 과학은 비로소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실체를 이해하게 만든 것이다. 그 혜택은 우리 모두가 받았다. 특히 철학자들은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으로부터 많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다. 이제 철학은 과학적 연구의 결과에 따라 심하게 요동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예를 들면, 가상현실(virtual reality)에 대한 과학적 연구 결과는 실재(reality)란 무엇인가 라는 철학적 문제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또한 분자 유전학(molecular genetics) 같은 과학의 연구 결과에 따라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철학적 논의도 크게 좌우될 것이다.

 

철학은 분명히 나름대로의 의의가 있다. 다만 철학의 역할에 대한 논의를 여기에서 길게 하고 싶지는 않다. 이 글에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철학은 역사적으로 종교와 과학의 절대적인 영향 하에 전개되어 왔다는 것이다. 또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따라서 종교와 과학에 대한 충분한 이해는 철학이 지나치게 사변적으로 흐르거나, 자칫 무의미할 수도 있는 논의로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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