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피우기

명(命)에 대한 생각

파라리아 2009. 6. 7. 03:52

 

나는 유독 명(命)에 관한 문제에 관심이 많다. 그것은 내가 살아오면서 명의 존재를 수없이 느꼈기 때문이다. 명이라는 말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이 세계에서 어떤 특별한 이유가 없이 일어나는 일들이다. 도대체 왜 그 시간에, 그 장소에서, 그 대상에게 그 일이 일어났는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경우에 해당된다. 삶의 수많은 것들이 이런 명의 지배 속에서 일어난다. 예를 들어, 나는 살다가 어떤 사람을 만난다. 내가 그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사실 전혀 예상치도 않았고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그와 내가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나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만한 영향을 준다. 사람들은 이런 경우를 일컬어 인연(因緣)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연(偶然)인가, 필연(必然)인가. 우연이라는 말과 필연이라는 말은 사실 같은 말이다. 필연적으로 보이는 일은 모두 우연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우연으로 일어나고 나중에 돌이켜 보면 그것은 필연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명(命)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게 된 모든 사람들이 사실 이처럼 특별한 이유가 없이 만나게 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이 명의 지배 하에 놓여 있다. 나는 비교적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의식이 강했다. 왜 어떤 사람은 부유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데 어떤 사람은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 것일까. 이것은 정말로 불공평하다. 또 내가 살면서 선택하는 모든 것들도 사실 명에 의해 주어진 조건 하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왜 철학이라는 학문에 그렇게 관심을 많이 가졌을까. 내가 철학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학교 도서관을 둘러보다가 우연히 눈에 띈 책 때문이었다. <플라톤 전집>이라는 이름의 그 책이 왜 나의 눈에 띄었을까. 어떠한 학생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그 책에 나는 왜 그렇게 관심을 가졌을까. 아무튼 잘 이해하지도 못하는 그 책을 읽고 나는 비로소 철학이라는 학문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분명 명이라는 개념이 아니고서는 이해될 수 없는 현상일 것이다.

 

모든 것이 이와 같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를 갖고 자유롭게 선택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살면 살수록 더욱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고 느낀다. 말하자면 나는 명이라고 하는 커다란 힘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민감한 사람들이 매트릭스라는 컴퓨터 시스템의 존재를 강하게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철학의 오래된 문제 중에는 ‘결정론(決定論)과 자유의지(自由意志)’라는 것이 있다. 이 세계는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어서 그대로 흘러갈 뿐 인간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과,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갖고 삶에서 선택해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말한다. 얼핏 보기에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의지를 갖고 마음대로 선택하며 살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나는 내가 지금 잘 것인지, 아니면 텔레비전을 좀더 보고 잘 것인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나는 점심을 학교 안에서 먹을 것인지, 아니면 학교 밖에서 먹을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마치 나의 모든 행동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선택들이란 기실 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조건들에 기인한다. 그것은 결코 ‘자유로운’ 선택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식사할 수 있고, 자유롭게 섹스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자유로운 선택인가? 우리가 무엇을 먹어야 하는 것은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육체를 통해 살고 있다는 운명과 그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영양을 공급해 주어야 한다는 운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일 뿐이다. 섹스는 어떤가. 자유롭게 섹스할 수 있다는 해방감을 느끼는가? 섹스 자체가 이미 운명이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종족 전체를 보존하기 위해 각 개체에 부여된 운명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알 수 없는 그 힘에 의해 자기도 모르게 섹스에 탐닉하게 된다. 그것이 진정 자유이고 선택인가? 나는 갈수록 결정론이 옳다는 결론에 다가가고 있다.

 

나는 모든 곳에서 시시각각 운명에 노출되어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강하게 느낀다. 장자가 말한 대로 삶과 죽음은 가장 큰 명(命)이다. 내가 계속해서 삶의 불확실성을 느끼고, 안정을 얻지 못하는 것은 삶과 죽음이라는 이 명의 의미를 풀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점점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것과 머지않아 죽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하면 도무지 삶의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죽음은 내가 삶에서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일순간에 무너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죽고 나면 내가 살면서 얻은 모든 지식과 지혜를 잃어버릴 것이다. 죽고 나면 내가 살면서 모은 모든 재산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삶에서 이룩한 모든 것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날아가 버린다면 도대체 삶에서의 그런 노력들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죽음의 의미가 풀리지 않으면 나에게는 삶의 의미 또한 풀리지 않는 것이다.

 

삶과 죽음에 관한 많은 이론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태어나는 것은 기(氣)가 모여 이루어지고, 죽음은 그 기가 다시 흩어지는 것이다”라는 기(氣)의 취산(聚散) 이론이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단지 그러한 자연의 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 어떤 이론은 인간은 육체가 죽어도 죽지 않는 ‘진정한 나(眞我)’가 있다고 말한다. 육체는 단지 이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존재하기 위해 진아가 기탁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진아가 영적인 성장을 하기 위한 학습으로 여겨진다. 어쨌든 여러 가지 이론들이 있다. 그러나 내가 분명히 깨달은 한가지는 다음과 같다. 즉, 이러한 이론들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그 이론을 믿고 사는 것은 문제의 본질적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꺼림칙한 의심은 계속해서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게 된다. 따라서 장자가 말한 것과 같이 스스로 도(道)를 체득하지 않는 한 근본적인 문제는 계속 우리를 따라 다니게 될 것이다. 장자가 말한 도란 이 세계의 질서 원리이니, 그 속에는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도 포함되어 있다.

 

나는 결국 운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나는 결국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내가 그것들과 싸우려고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그것은 결국 나의 몸과 마음을 괴롭히는 일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명에 순응하는 태도는 근본적으로 존재계에 대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장자가 말한 ‘조화자(造化者)’에 대한 깊은 신뢰를 의미한다. 조화자가 나에게 주는 어떠한 운명이라도, 그가 나를 사랑하고 궁극적으로 나를 올바로 이끌 것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에게 주어질지 모르는 온갖 불행들을 내가 어떻게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이미 역사상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유 없는 불행으로 고통을 겪었고 죽어 갔다. 전쟁이 한번 일어나면 정치와 아무 상관없는 무고한 사람들이 집을 잃거나 죽임을 당했다. 또 전염병이 창궐하면 평소에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그 끔찍한 병에 걸려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은 현재에도 계속 일어나고 있고 미래에도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다. 문명이 아무리 발달한다 해도 인간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이러한 명의 움직임은 절대로 피할 길이 없다. 존재계의 미시적(微視的)인 곳에서부터 우주 전체에 이르기까지 명의 움직임은 곳곳에 퍼져 있다.

 

명에 관해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 중에서 무엇을 명으로 여길 것인가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왜냐하면 명에 순응해야 한다는 사상은 심각한 악용(惡用)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명에 순응해야 한다는 사상은 사회 지배층이 자신에게 유리한 사회구조를 정당화시키는 논리로 작용할 수 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인도에서 일어난 현상이다. 인도에는 카르마(karma) 사상이 있다. 이것은 자신이 전생에 행한 업보에 따라 현생에서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하층 계급으로 태어난 사람은 그 계급으로 태어날 운명이고, 지배 계급으로 태어난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은 자연의 질서이므로 이에 저항하는 것은 종교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이것이 진정 명에 순응한다는 것인가.

 

또한 말 그대로 주어진 모든 것에 그냥 순응하고 살아야 한다는 논리는 삶을 소극적 . 수동적으로 만들어 버리며,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고 잘못된 것을 고치려는 노력을 없애 버릴 수도 있다. 이것은 명에 순응해야 한다고 믿는 많은 사람들에게 실제로 일어나는 병폐이다. 사실 이것은 명 사상이 빠지기 쉬운 논리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모든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명의 진정한 의미는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명에 순응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움에 순응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행위는 명이 아닌가. 나는 그 또한 명이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잘못된 질서를 고치려는 노력 또한 충분히 명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혁명(革命), 즉 명을 바꾼다는 표현을 쓰지만, 그 혁명 또한 하나의 명이라는 생각은 충분히 가능하다. 이쯤 되면 명이라는 개념이 조금씩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명이고 무엇이 명이 아니라는 말인가. 무엇이 명인지가 분명해져야 그 명에 순응할 것이 아닌가. 나는 이러한 점에서 명에 순응해야 한다는 말이 갖고 있는 일종의 난점(難點)을 발견하였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무엇이 명인지 알아야 그 명에 순응할 수 있을 텐데, 무엇이 명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선택의 상황이 주어질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명인지를 알아야만 그 명에 순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문제는 명백한 선택의 상황이 왔을 때는 무엇이 우리의 명인지 결정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이럴 때 점을 쳐 본다거나 사주를 본다거나 하지만, 그것들이 우리의 명을 알려준다는 증거도 없다. 결국, 우리는 명백한 선택의 상황에서는 다만 ‘최선의’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이고, 무엇이 명인지는 지나고 나서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선택을 하는 것마저도 이미 명일 수 밖에 없다면 결국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그저 매 순간 순간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하며, 그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들에 대해서는 순응해야 할 것이다. 최선을 다하되 지나간 결과에는 집착하지 않는 태도가 진정으로 명에 순응한다는 말의 의미가 아닐까 한다.

 

 

2003.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