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피우기

이론과 삶의 체험

파라리아 2009. 6. 7. 04:26

 

우리가 뭔가 결론을 내릴 때, 반드시 거기에 이론적、논리적인 이유를 갖다 붙이는 것이 합당한 것일까? 많은 경우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서, 그 결론의 정당성을 다른 사람들에게 합리화하기 위해 이유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결론이란 기실 논리적 사고의 결과라기보다는 그 사람의 삶의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정말로 공정하고 객관적인 사상가라면 결코 마음속에 미리 결론을 내어서는 안된다는 데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고, 자신의 결론을 주장하는 사람도 또한 처음부터 자신이 이런 결론을 선호했다고 털어놓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근거들에 의거해 이런 결론을 내렸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역시 많은 경우 결론은 그 논리적 이유보다 앞서서 내려지는데, 그 원인은 그 사람의 삶의 경험인 듯하다.

 

예를 들어,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들은 각자 여러 가지 근거와 이론을 제시하며 자신의 설이 옳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들 주장의 근본적인 차이는 그들의 삶의 경험이 다르다는 데에 있다. 유복한 가정에서 행복하게 자라났다거나, 혹은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거나, 혹은 자기 자신의 마음이 악한 짓을 못하는 착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성선설 쪽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크다. 또, 주변 환경에서 온통 악한 모습들만 보아 온 사람이라면 사람이 원래 악하다는 성악설 쪽으로 기울어질 것이 뻔하다. 그 때, 그들의 결론을 정당화해주는 논리적 증명은 사실 큰 의미가 없다. 이러한 논리적 증명은 아마도 책을 쓰거나, 많은 사람이 읽는 신문 같은 곳에 글을 쓸 때나 필요할 것이다.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보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많이 보았다. 가난하게 자라 온 사람은 대체로 좌파적인 시각을 가질 가능성이 많고, 부유하게 자란 사람은 우파적、보수적인 시각을 가질 가능성이 많다. 삶의 경험에 의해 선호하는 결론이 미리 정해지고 논리적 근거는 그 다음에 구성된다. 이 말은 그 사람의 삶의 경험이 달라진다면 그가 믿는 결론 역시 논리적 근거에 상관없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가난하게 자라 왔기 때문에 온통 좌파적인 시각으로 가득 차 있던 사람에게 훌륭한 집과 재산과 아름다운 여자를 주면, 그 사람은 머지않아 우파적인 시각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많다. 자기가 가진 것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반대로 부유하던 사람도 어느날 홀딱 망해서 빈털털이가 된다면 그는 머지않아 좌파적인 시각으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 그 결론에 대한 이론적 근거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원래부터 교회를 다니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거나, 혹은 자신의 삶에서 신의 존재에 대한 깊은 체험을 한 사람이라면, 그 다음에는 신이 존재한다는 이론적 근거를 찾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왜 신이 존재하는지를 스스로에게 정당화시키고 그 이론적 근거로써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그렇게 신의 존재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만들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이며, 그런 결론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 이론적 근거는 단지 사족 같은 것에 불과하다. 이론적、논리적 근거를 따지자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 또한 충분히 훌륭한 논거를 구성해낼 수 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어떠한 사상가의 이론도 그 사상가의 삶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삶에 대해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가 어떻게 자랐는지, 어떤 사람들을 만났는지, 어떤 책을 읽었는지, 성격은 어땠는지, 무슨 직업을 가졌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등등에 대해 반드시 알아보아야 한다. 나는 이전에는 이런 일들에 무관심했다. 그냥 어떤 사상가의 책을 읽어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어떤 사람의 사상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 자체를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997년 미국 The University of Alabama에 내가 교환학생으로 갔을 때, 당시 <서양근대철학사>를 강의하던 한 젊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어떤 철학자의 사상을 공부할 때는 전적으로 결론을 이끌어내는 그의 논증만을 보아야지 그 사람을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을 보는 것은 논점에서 어긋난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접근 방식이 대체로 서양에서 철학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마치 수학 문제를 풀듯이 철학을 대하는 것 말이다. 예컨대, 어떤 수학자가 긴 증명 과정을 통해 하나의 결론을 도출했다고 하자. 우리가 만일 그 증명 과정 자체에 대한 검토 이외에 그것을 만들어낸 수학자의 인격이라든지 외모 같은 것을 거론한다면 분명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서양 철학의 전통에서는 철학 역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엄밀하게 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철학은 수학이 아니고 과학도 아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철학에 있어서 한 사람의 사상은 그 사람의 삶의 체험과 동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 나의 관점이다. 오히려 논증 자체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2003.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