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피우기

귀납과 연역에 대하여

파라리아 2009. 9. 3. 23:13

 

교과서적으로 이야기하면 연역이란 하나의 전제로부터 개별적인 명제들을 이끌어 내는 방식이고, 귀납이란 개별적인 여러 사례로부터 하나의 명제를 도출해 내는 방식이라고 하겠습니다. 수학은 연역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지식을 탐구하는 대표적인 예이고, 자연과학은 귀납적인 방식으로 지식을 탐구하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귀납적인 방식은 구체적으로는 관찰과 경험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사례에 대한 관찰을 통해 어떤 지식이나 법칙을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귀납적인 방식은 단 하나의 반증만 발견되어도 언제든지 거부될 수 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귀납적인 방식으로는 <의심할 수 없이 확실한 지식>은 발견할 수 없다고 할 수 있겠죠. 귀납법만으로는 <완전한 지식체계>를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관찰과 경험을 통해 “중력의 법칙”이 발견되어 하나의 지식을 이루었다고 해도, 사과가 언젠가는 땅과 반대 방향으로 떨어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 발견한 사실들을 법칙이라는 지식으로 만들어 사용합니다. 말하자면 불완전한 지식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주의 모든 존재들은 기본적으로 귀납적인 방식에 의해 이 세계를 파악하고 그에 따라 적응하며 살아갑니다. (귀납적인 지식에서 ‘모든’ 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정말로 예외 없이 모든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편의상 그렇게 부를 뿐이죠.) 아침마다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며 삽니다. 만일 태양이 떠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며 사는 존재가 있다면 아마도 정신치료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지식이 기본적으로 귀납적이라는 저의 말은 이런 의미에서입니다.

 

그럼 연역적인 방식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죠.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연역적인 방법이란 어떤 확실한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다른 개별적인 사실들을 끌어내는 방식입니다. 수학에서는 공리(公理)와 같은 전제를 이용해서 연역적으로 다른 정리들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연역적 방법에 있어서 전제의 확실성은 가장 큰 중요성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제 자체가 틀려 버리면 그 전제로부터 도출된 다른 지식들은 확실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죠. 저는 수학에 있어서는 그런 연역적인 방식을 통해 충분히 새로운 지식을 도출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문제는 실제 세계에 관한 것입니다. 연역적인 방식이 과연 실제 세계에 적용될 수 있느냐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수학의 세계는 실제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물론 실제 세계에서 아이디어를 얻지만) 관념의 세계이기 때문에 확실성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보장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느끼고 사는 이 현실 세계에서는 <의심할 수 없이 확실한 지식>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절실하게 느꼈던 사람 중에는 아마도 데카르트가 있을 것입니다. 그는 수학자였기 때문에 수학적 지식의 확실성을 현실 세계에서도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학처럼 의심할 수 없는 대전제가 있어야 할 텐데,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지식을 얻는 수단은 기본적으로 감각, 즉 경험과 관찰입니다. 그러나 감각은 자주 우리를 속이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결국 감각과 상관없는 것, 즉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유일하게 확실한 지식이라고 결론짓습니다. 데카르트는 바로 이 전제(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로부터 다른 확실한 지식들을 연역해내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심지어 이 전제로부터 신이 존재한다는 지식까지도 연역해 냅니다. 그런데 과연 그의 대전제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가 정말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한 지식입니까? 이 명제가 명석 판명하다고 믿은 것은 결국 데카르트 자신일 뿐입니다.


이처럼 현실 세계에서 연역적으로 지식을 도출하려고 하면 <확실한 전제>라는 벽에 부딪히게 되며, 결국 우리는 관찰과 경험을 통한 <제한적인 전제>로부터 역시 <제한적인 개별 지식>들을 도출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전제 자체가 이미 관찰과 경험을 통해 귀납적으로 얻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 모든 지식 도출 과정이 철저히 귀납적인 방법에 의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지식에 있어서 엄밀한 의미의 <완전한 지식 체계>는 있을 수 없습니다. 단지 이제까지 알려진 최선의 지식일 뿐이죠.


연역적 지식에 대한 집착은 결국 형이상학에 대한 집착이라고 생각합니다. 형이상학은 근본적으로 경험과 관찰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순수 사유를 통해 얻어질 수 있는 지식이라고 간주되어 왔습니다. 예를 들자면 신(God)에 대한 지식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현실 세계에서의 <확실한 전제>의 문제가 걸리기 때문에, 형이상학은 사실 그 존재 자체가 불안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만일 형이상학이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면 철학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식, 즉 신에 대한 지식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닥치게 되겠죠. 그렇게 되면 신에 대한 지식은 결국 철학의 문제가 아닌 신앙과 믿음의 문제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나 만일 경험과 관찰로 증명 가능한 지식만이 의미 있는 지식이라면 철학은 자신의 아주 커다란 영역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미 잃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렇게도 연역적 지식에 집착해 온 것입니다.


우리가 지식의 일부로 간주하는 많은 것들이 사실 이런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입니다. 신에 관한 것, 혹은 도(道)나 기(氣), 태극(太極) 같은 것들도 그 경험적인 기반 없이 자주 언급되는데 저는 이런 것들에 관한 지식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지식으로 간주하고 싶지 않습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의미 있고,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지식이란 기본적으로 경험과 관찰이 가능한 사실이나 현상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20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