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피우기

헤라클레이토스와 플로티누스의 비교 (1997)

파라리아 2009. 9. 4. 00:43

 

  헤라클레이토스는 소크라테스 이전인 B.C. 6세기경에 살았던 그리스 철학자이고, 플로티누스는 훨씬 뒤인 A.D. 3세기에 주로 로마에서 활동한 철학자이다. 이 두 사람의 사상이 어떻게 비교적인 관점에서 기술될 수 있는가는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 이유는 첫째로, 대부분의 철학자들처럼 두사람도 서로 다른 용어들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세계를 움직이는 절대의 법칙, 혹은 신(神)을 '로고스(Logos)'라고 부르고, 플로티누스는 이 세계가 유출된 그 근원적인 것을 '일자(一者, The one)'라고 부르는 등 서로 용어에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로고스와 일자와의 관계가 어떠한지, 이 둘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를 밝히는 작업에 있어, 언어적 표현 차이에만 얽매여서는 안될 것이다. 둘째로, 플로티누스의 경우는 <에네아데스>라는 그의 방대한 논문집이 남아 있지만, 헤라클레이토스의 경우는 다른 사람 -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 의 저서 속에 단편으로서만 인용되어 있기 때문에 그 완전하고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헤라클레이토스와 플로티누스의 사상을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두 철학자의 사상을 비교하는 가운데 각각의 사상에 대한 윤곽도 잡히게 될 것으로 본다.


1. 신비주의적 경향

  헤라클레이토스와 플로티누스는 모두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다. 신비주의적이라는 말은 보통의 이성적인 추론의 영역을 넘어선 어떤 초월적 영감을 받았다는 것인데, 그리스 철학의 전통 속에는 신비주의의 측면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대체로 초기 오르페우스교로부터 피타고라스 학파, 헤라클레이토스 등이 매우 신비주의적이고, 플라톤에게서는 신비적인 영역과 이성적인 영역이 동시에 나타나며,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신비적인 부분이 별로 보이지 않고 철저하게 이성적, 논리적인 철학이 전개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그의 시대에서도 ‘수수께끼를 이야기하는 사람’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의 말들은 예언자적인 경구 스타일을 지녔다고 한다. 또, 비유와 은유 등을 많이 썼으며, 논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모순처럼 보이는 말도 많이 했다. - “선과 악은 하나다” 등 - 그러나 그의 말에는 힘이 있고, 뛰어난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모든 특징은 대부분의 신비 사상가들이나 종교 사상가들에게 잘 나타나는 특징이다. 헤라클레이토스도 어떤 의미에서는 철학자이면서 종교가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지만, 그는 역사에 의해 철학자적인 면이 주로 부각되어 왔다.

  플로티누스에게서는 신비주의적 경향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구원이란 근원의 존재인 일자와의 합일이며 그 자신이 일생동안 여러번 이런 합일(合一)을 경험했다고 한다. 또 일자는 체험할 수는 있으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함으로써 일자가 노자의 도(道)와 유사한 어떤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2. 로고스(Logos)와 일자(一者, The one)

  헤라클레이토스는 우리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듯이, 모든 사물은 끊임없이 변해간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영원히 타오르는 불로 상징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기본적인 세계관은 이와 같이 변화, 즉 무상성(無常性)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상성 뒤에는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 무엇이 있는데, 헤라클레이토스는 이것을 로고스(Logos)라고 불렀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있어서 로고스는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이며 진리이다. 로고스를 깨달은 사람에게 이 세계는 하나이다. 로고스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만물을 개별적인 것들로 나누어 파악하지만, 로고스를 아는 사람은 만물이 본래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선과 악도 하나고, 낮과 밤, 겨울과 여름, 전쟁과 평화 등이 실은 모두 하나이다.

  이번엔 플로티누스의 생각을 보자. 플로티누스는 만물이 하나의 근원으로부터 나왔다고 말한다. 그 근원을 플로티누스는 일자(一者)라고 이름한다. 일자는 어떤 것보다도 위에 있는 근원자이다. 그러므로 일자는 인간의 언어로써는 표현할 수 없다. 그 일자는 자체의 속성으로 인해 하위 단계의 것들을 유출한다. 마치 태양이 그 빛을 방출하듯이. 일자로부터 유출된 것은 계속해서 자기보다 더 낮은 것을 유출하는 원인이 된다. 그래서 일자로부터 맨 처음 누스(nous)가 나왔으며 누스로부터 영혼이 나오고 영혼으로부터 이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이 나오게 된다. 사물들은 두가지 성질을 지닌다. 하나는 자기보다 낮은 단계의 사물을 유출하려는 성질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보다 윗단계의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성질이다. 근원으로 돌아가 궁극적으로는 최초의 유출 원인인 일자와의 합일을 희구한다.

  로고스와 일자는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헤라클레이토스와 플로티누스는 서로의 사상에 있어 모순되는 점은 별로 없다. 오히려 상당부분에서 유사한 점을 엿볼 수 있다. 우선 로고스와 일자는 모두 근원적인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이 양자는 모두 개별적인 사물들에 분유(分有)되어 있다. 그러나 플로티누스의 일자가 어떤 근원적 <존재>를 의미하는 반면,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는 어떤 존재라기보다는 근원적 법칙을 가르키는 것 같다. 즉, 로고스는 플로티누스가 말하는 누스(nous)에 더 가까와 보인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라는 말 이외에 신(神)이라는 말도 쓰고 있는데, 아마도 플로티누스의 일자와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신(神)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그들에게 있어 이 물질세계는 그 근원적인 무엇에 따라 생겨나는 것이다.

  또 로고스와 일자는 지식으로 파악될 수 없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많이 배움으로써 진리를 알 수는 없다고 말했고, 플로티누스는 진리의 경험, 즉 일자와의 합일을 위해서는 모든 지식을 버리고 외부 세계로부터의 모든 것을 끊어 버리라고 말했다. 이처럼 유사한 방법을 실천했을 경우에 나타나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유사한 어떤 것이 될 가능성이 많지 않을까? 나는 그러한 점에서 신비적 사상들의 일치점을 찾는다. 노자(老子)도 도덕경에서 “학문은 날마다 (지식을) 쌓아가는 것이고, 도를 행함은 날마다 (기존의 지식을) 비워가는 것이다.” 라고 했다. 근원적 도(道)에 이르는 위해서는 자신이 갖고 있던 지식, 선입견 등을 계속 비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사람들은 많은 지식을 습득할 것이 요구되어져 왔고, 심지어 신에 관한 지식까지 암기하고 있어야 했다. 철학을 하기 위해서도 철학사에 대한 수많은 지식을 쌓아야 하는 세상이다. 그러니 로고스나 일자, 도가 있다 해도 이러한 세상 분위기에서는 그것들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이 별로 없는 것 같다.


3. 영혼의 불멸성, 그리고 윤회설

  플로티누스는 영혼이 육신을 떠나면, 또 다른 육신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윤회설을 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세계 영혼이 각각의 육신 속에 들어 가게 되는 것은 불행이다. 그 때 개별적인 영혼은 전체에서 분리된다. 그러나 영혼이 육신에서 분리되었을 때, 그 영혼이 죄를 많이 범했을 경우에는 다시 다른 육신으로 들어가 그 죄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엔 기본적으로 윤회설에 대한 믿음이 들어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경우는 어떤가? 그의 단편 중에 이런 것이 있다. “가멸적(可滅的)인 것들은 불멸의 것들이고, 불멸의 것들은 가멸적인 것들이다. 하나는 다른 것의 죽음을 살리는 동시에 다른 것의 삶을 죽인다.” 이 말은 곧 삶은 죽음으로부터 나오고 죽음은 삶으로부터 나온다는 영혼 윤회설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또 “ 한 원이 시작되는 점과 끝나는 점은 같다.” 는 말 역시 윤회설에 대한 암시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식의 해석이 무리일 수도 있겠으나,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있어서 분명했던 것은, 사물의 끊임없는 변화는 서로 반대되는 것들로의 전이(轉移)라는 점이다. 대립되는 것들은 서로가 서로를 낳으며, 서로에게 의지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하나이지, 완전히 대립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헤라클레이토스가 응당 삶과 죽음은 하나이며, 서로가 서로를 낳는다고 주장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억지가 아닐 것이다.


4. 신의 속성

  플로티누스에게 있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일자, 즉 신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신의 일부을 공유하고 있다. 악(惡)마저도 그 궁극적 근원은 신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경우는 이렇게 말한다. “신은 낮과 밤이며, 겨울과 여름, 전쟁과 평화, 배부름과 배고픔이다. 그러나 신은 여러 가지 형태를 띤다.”, “ 신에게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선하며 공정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것은 공정치 못하고 또 어떤 것은 공정하다고 말한다.” 두 사람에게 있어 신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존재이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들이 볼 때 좋고 선한 것은 신에게 그 원인을 돌리고, 그렇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악마의 탓으로 돌리거나 매우 증오하는 경향을 지닌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편견일 뿐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신에게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선하다고 했다.


5. 변화에 대한 설명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의 핵심은 변화와 로고스이다. 사물의 변화를 지배하는 법칙은 로고스다. 그럼 플로티누스에게는 사물의 이와 같은 변화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플로티누스에 의하면 일자로부터 유출된 사물은 두가지 성질을 지닌다. 하나는 더 낮은 단계의 존재를 낳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시금 일자로 돌아가려는 끊임없는 의지다. 사물의 끊임없는 변화는 바로 이와 같은 두가지 성질에 의해 야기되는 것으로 보인다. 사물이 한시도 고정된 상태로 머물러 있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자와 합일하지 못하는 한, 사물은 언제나 불안정한 상태에 있게 된다. 이것은 흡사 고향을 떠나 객지를 떠돌아 다니는 나그네가 늘 맘이 편하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물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만 말했지 왜 그런지 설명은 덧붙이지 않았다. 이 설명이 플로티누스의 사상으로 보완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


  이상으로 헤라클레이토스와 플로티누스 사이의 사상을 비교해 보았다. 나는 이 두 철학자가 신비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음에 주목하여 두 사상의 공통되는 부분이나, 두 사상이 어떤 식으로 연결될 수 있는가에 중점을 두어 글을 전개시켜 나갔다. 물론 여러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철학자의 사상처럼 근원적인 문제, 혹은 신의 문제에 관한 것은 쉽게 해석을 내릴 수 없는 난점이 있다. 왜냐하면 궁극적 존재에 관한 것은 개인적이고 신비적인 체험 이외에, 만인에게 똑같은 객관적인 증명 같은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성질 떄문에 두 사람의 사상은 또한 대단히 종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199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