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피우기

변하는 기술, 변하지 않는 인간의 삶

파라리아 2009. 5. 17. 01:19

 

나는 더 이상 펜으로 글을 쓰지 않는다. 종이에 손으로 글을 쓰는 것이 어렵다. 다이어리나 포스트잇에 간단히 메모할 경우를 제외하고 - 이것도 손놀리는 것이 귀찮아 마구 갈겨 쓴다 - 긴 글을 써야 할 경우에는 거의 항상 노트북 컴퓨터를 꺼내 든다. 대학에서 컴퓨터로 글을 써서 제출하는 풍토가 생긴지 15년 정도 된 것 같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1993년만 해도 심지어 원고지에 레포트를 써서 내야 했던 적도 있다. 대개는 레포트 용지에 손으로 써서 내곤 했었지만. 이제는 누구나 컴퓨터로 레포트를 써서 이메일로 제출한다. 편리하기로 치면 이만한 것이 없다.

 

지나간 것은 항상 아쉬운 법이다. 사람들이 더 이상 손으로 글을 쓰지 않고, 편지라는 것도 보내지 않게 된 지 오래다. 옛날의 향수에 젖어 있는 사람들, 혹은 옛날 방식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방식을 비판할지 모른다. 하지만 편리한 것이 나왔을 때 옛날 방식은 사라지는 것이 이치이다. 2천년 전 대나무를 엮어 만든 죽간(竹簡)이 광범위하게 쓰이다가, 종이가 발명되자 죽간은 온데 간데 사라져 버렸다. 100년 전만 해도 우리는 붓을 쓰다가 볼펜과 연필을 쓰게 되었고, 연필은 이제 샤프펜슬로 대체되었다. 앞으로의 세대는 모두 컴퓨터 키보드를 이용해 글을 쓰게 될 것이다. 또 그 이후에는 음성으로 말하면 바로 글자로 입력되는 방식이 보편화될 지도 모른다. 기술이란 그런 것이다. 편리한 방향으로 바뀌면 그에 따라가는 것이 현명하다.

 

우리는 테크놀로지가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 발전 속도는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지난 역사에서는 500년에 걸쳐 일어날만한 기술의 발전이 지금은 단 몇 달만에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컴퓨터는 점점 작아지고 점점 강력해지고 있으며, 몇 년 안에 컴퓨터는 모든 물건에 장착될 것으로 예상된다. 미래의 컴퓨터는 더 이상 지금과 같은 형태를 띠지 않을 것이다. 컴퓨터는 모든 곳에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인류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엄청난 변화의 세기를 살고 있다.

 

그러나 기술이 아무리 최첨단으로 발전한다 해도 인간이 사는 데 있어서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기술의 발전은 단지 살아가는 수단이 편리해짐을 의미한다. 인간은 컴퓨터가 없어도 살 수 있고, 각종 전자 장비들이 없어도 살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인간에게 있어 덤으로 주어진 것일 뿐, 이런 것들로 인해 인간의 삶이 근본적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만일 2천년 전의 사람이 갑자기 현대로 옮겨진다면 그는 얼마간 이 눈부신 기계 문명에 놀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곧 이 문명에 적응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현대인이 갑자기 2천년 전으로 옮겨진다면 그는 얼마간 생활의 불편을 겪겠지만 결국 그 사회에 적응하며 살게 될 것이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것은 의식주(衣食住)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그 관계 속에서 얻는 즐거움, 이런 것들이다. 내가 보기에 결국 작은 시골 마을에서 사는 2천년 전 사람이나, 우주를 여행하며 살게 될 미래의 사람이나, 그 삶 자체는 별반 차이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2천년 전의 사람이 가졌던 많은 삶의 문제들을 미래의 사람도 여전히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가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자기 성찰을 하며 사는가이다. 그것은 2천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여전히 그러할 것이다.